6. 실감 나는 현실, 그 첫 페이지

by 오늘의날씨는

6. 실감 나는 현실, 그 첫 페이지

한국 날씨가 좋다고 해서 일본도 똑같이 좋을 리가 없는데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들뜬 마음에 날씨 어플조차 확인하지 않은 나를 자책했지만 배고픈 아이들의 목소리는 후회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공항에서 대충 끼니를 때우며 택시 줄이 줄어들기를 기다렸다.


일본은 택시비가 비싸다고 들었는데 줄이 이렇게 길 정도면, 이 비가 누구나 당황할 만큼 갑작스러운 것이었던 걸까?

한가득 쌓인 짐을 가게 밖에 두고 아이들에게는 달콤한 주스가 포함된 어린이 세트를 우리는 덮밥을 주문했다.

일본에서의 첫 식사라며 낭만을 기대했지만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유리창 너머로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렸지만 식사를 마치는 순간까지도 빗줄기는 가늘어지기는커녕 더 굵어지고 있었다.


"짐이 많으니 택시 두대로 나눠서 탈까?"


남편이 보고 온 택시들은 영화에서나 볼 법한 클래식 세단이었고 간혹 큰 차가 보였지만 대부분 우리 짐을 다 싣기엔 작아 보였다.

공교롭게도 우리 차례가 된 택시는 역시나 작은 세단이었다.


기사님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우리는 미안함을 온몸으로 표현하며 정중하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조수석에 상자 하나, 뒷좌석에 캐리어 하나를 우리가 안고 나머지는 트렁크를 열어 끈으로 고정했다.

얇은 밧줄 하나에 의지해 빗속을 달리는 내내 불안했지만, 다행히 목적지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대충 짐을 풀고 아이들을 씻기고 재우고 나니 그제야 정적이 찾아왔다.


"고생했다, 여보."


"... 그러게. 원래 이런 건가? 그냥 좀 웃기네."


허탈한 웃음을 주고받으며 후쿠오카에서의 첫날밤이 지나갔다.

하지만 안도감은 찰나였고,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한 변수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연말연시 휴일을 앞두고 재류자격(COE)은 나오지 않았고, 기존 숙소의 연장이 되지 않아 새로운 숙소를 옮기자마자 첫째가 기침을 시작했다.

열은 없었지만 밤마다 심해지는 기침 소리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일본의 병원들은 연휴를 앞두고 문을 닫았고, 대형 병원은 응급 상황이 아니면 받아주지 않았다.

절망적인 마음으로 한국행 티켓을 검색했지만 화면엔


"매진"


이라는 글자만 보였다.


낮엔 멀쩡하다가 밤만 되면 심해지는 기침

나중에야 깨달았다. 히터가 뿜어내는 건조한 공기가 원인이었음을

거실만한 공간에 침대 두 개를 밀어 넣고 네 식구가 부대끼며 의식주를 해결하다 보니, 가습기를 새로 살 생각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공간이 협소해진 만큼 내 생각의 범위도 작아져 버린 기분이었다.

궁여지책으로 방 안에 젖은 빨래를 가득 널어 습도를 채워주자 아이의 기침 소리도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기침 소리로 12월을 마무리하고 1월이 되자 우리는 새 집에서 쓸 가전과 가구를 사러 나섰다.

여러 매장을 추천받았지만 체력이 한계에 다다른 상태라 숙소와 가까운 캐널시티의 '니토리'에서 모든 걸 해결하기로 했다.

가구는 좀 고민해 보기로 하고 당장 급한 세탁기 먼저 골랐다. 1월 초에 구매를 했지만 배송 가능한 날짜는 입주 다음날인 16일이었다.


세탁기를 고르고 주소와 전화번호를 쓰는데 갑자기 점원이 서류 한 뭉치를 꺼내기 시작하며

생소한 질문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세탁기 자리 크기랑 수도꼭지 길이는 아시나요?"


"복도 폭은요?


"엘리베이터는 있나요?"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정말 아는 게 하나도 없고, 낯선 땅에서의 생활은 세탁기 하나 사는 것조차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집만 구하면 끝날 줄 알았던 나의 안일함은 매장 직원의 질문 몇 마디에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나의 서툰 후쿠오카 생활은, 이제 막 첫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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