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기 하나를 사는데 현관문 크기며 복도 폭까지 알아야 한다는 사실에 그 어느 때보다 당황했다.
가보지도 않은 집의 구조를 내가 어떻게 알 것이며, 가봐도 세탁기 자리까지 재야 한다는 걸 그때의 내가 알았을 리 없다.
기껏해야 커튼을 달 생각으로 창문 크기나 재고 왔겠지.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남편과의 유일한 휴일을 망치는 기분이라 답답함과 짜증이 확 올라왔다.
그때 문득 연휴 전날, 부동산에서 치수를 적어놓은 도면을 보냈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점원과 머리를 맞대고 작은 휴대폰 화면 속 사진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세탁기 자리를 겨우 찾아냈다.
수많은 서류에 사인을 하고 긴 설명을 들은 뒤에야 구매를 마무리할 수 있었고, 점원은 가장 중요한 한마디를 잊지 않았다.
"사이즈가 맞지 않아 회수할 경우, 비용은 고객 부담입니다."
이후 냉장고 등 부피가 큰 물건을 살 때마다 모든 점원이 맞춘 듯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분명 같이 확인해 놓고도 끝까지 책임의 소재를 분명히 하는 그들의 모습에 허탈한 웃음만 지었다.
시간은 흘러 입주 전날인 1월 15일이 되었다.
다행히 일본의 깐깐한 매뉴얼도 나름의 융통성은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당일 아침에 받았을 집 열쇠를 입주일이 부동산 휴일이라는 이유로 전날 미리 건네받게 된 것이다.
"짐만 미리 옮겨둬도 될까요?"
라는 조심스러운 질문에, 어차피 공실이니 괜찮다는 쿨한 답변이 돌아왔다.
웬일이지?
깐깐함과 매뉴얼에 지쳐있던 와중에 의외의 대답을 들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입국 때처럼 짐이 많아 차의 트렁크가 닫히지 않는 사태를 막기 위해, 그 사이 늘어난 살림살이들을 가방마다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아이들과 버스를 탈까 고민도 했지만, 어림도 없다는 듯 하늘에선 세찬 비가 쏟아졌고 고민 없이 택시를 불렀다.
택시 밖 낯선 풍경을 보던 중 남편이 말을 건넸다.
"여보, 일본 부동산이 왜 수요일에 많이 쉬는지 알아?"
"글쎄, 이유가 뭐야?"
"수요일의 한자가 물 수(水) 자잖아. 계약이 물처럼 흘러가 버린다는 미신 때문에 주로 수요일에 쉰 대."
평소라면 무심코 넘겼을 부동산의 휴일 이유까지 꿰고 있는 남편이 어색하면서도 다르게 보였다.
낯선 타국 땅에서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을까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이 땅의 규칙을 이해하려 애쓰는 남편이 조금은 안쓰러워 보였다.
철저하게 매뉴얼을 읊으며 혹시 모를 리스크를 대비하던 세탁기 가게 점원의 모습과, 계약이 떠내려갈까 봐 문을 닫는 미신적인 모습
이 이질적인 조합이 왠지 일본이라는 나라의 진짜 얼굴을 살짝 보여주는 듯했다.
미신은 믿으면서 한 번 정해진 매뉴얼은 끝까지 고수하는 그 묘한 경계선 위에서 우리의 본격적인 일본 생활이 시작되고 있었다.
드디어 도착한 우리 집
하지만 입구가 어디인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어 한참을 헤매다 택배 기사님의 도움으로 겨우 현관을 찾았다.
당연히 샛길일 거라 짐작하며 지나쳤던 좁은 길로 들어서니 자전거 주차장이 나타났고, 그 주차장을 가로지르고 나서야 비로소 현관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숨바꼭질이라도 하듯 꽁꽁 숨겨진 입구가 무척이나 낯설었다.
어린 시절, 잃어버릴까 봐 목에 걸고 다니던 그 투박한 열쇠를 성인이 되어 타국에서 다시 사용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잠시 옛 생각에 잠겨 제법 흥미롭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공동현관과 집 문을 차례로 열고 들어설 때 느껴지는 그 묵직한 금속의 감각이 나를 현실로 불러들였고 이제 정말 일본에서의 삶이 시작되었음을 실감 나게 했다.
집의 문을 열자마자 짐을 한 군데 몰아놓고, 남편 회사 사무실에서 겨우 찾아온 줄자를 꺼냈다.
도면으로 확인했지만 가시지 않던 불안감을 털어내려 세탁기 자리와 현관 치수를 직접 재보았고, 다행히 세탁기가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여유가 있었다.
확인을 마치고 마음이 놓이자 긴장이 풀렸는지 그제야 집의 구조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4인 가족이 살기에 적당하고 시간에 쫓기면서도 끝까지 남향을 고집한 보람이 느껴질 만큼 공간은 아늑했다.
어수선한 짐들을 조금이라도 정리해두고 싶어 불을 켜려고 스위치를 눌렀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어? 왜 불이 안 켜지지?"
천장을 올려다보니 전등이 있어야 할 자리가 휑하니 비어 있었다.
"설마 다 없는 건 아니겠지" 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모든 방의 천장을 확인했지만, 화장실과 주방을 제외한 그 어디에도 전등은 없었다.
비까지 내려 날이 잔뜩 흐린데, 전등도 없는 빈집에서 이 많은 집을 정리해야 한다니.. 당황스럽고 어안이 벙벙했지만 할 일은 해야 했다.
결국 아쉬운 대로 휴대폰 플래시를 켜서 방을 비추고, 좁은 불빛에 의지해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두컴컴한 거실에서 춤추는 플래시 빛에 아이들은 마냥 재미있어했지만, 나와 남편의 마음은 복잡해졌다. 타지에서 작은 불빛 하나에 의지해 이삿짐을 푸는 우리 가족의 모습. 그 광경이 안쓰러우면서도 한편으론 말할 수 없이 애틋하게 느껴졌다."
비 오는 후쿠오카의 입주 첫날
부동산을 원망하는 마음도 잠시, 어쩌면 전등 없는 천장은 이 나라가 당연하게 여기는 '기본 상식'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등 없는 휑한 천장은 이 낯선 땅이 우리 가족의 앞길에 조용히 세워둔, 차갑고도 거대한 첫 번째 벽이었다.
환영한다는 말 대신 어둠과 침묵으로 일관하는 이 공간에서, 나는 우리가 정말 이방인임을 실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