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두 번째 벽' 아날로그와 에어컨 사이

by 오늘의날씨는

어둠 속에서 겨우 짐만 몰아넣고 돌아온 그날은 유독 시간이 빨리 흘러갔다.


다음 날

드디어 공식적인 입주 날이 되었다.

이제 내 집에서 편하게 쉴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안고 묵직한 철문을 열었지만 나를 맞이한 건 여전히 어두운 집과 시린 냉기 그리고, 어제 미리 옮겨둔 짐들이 텅 빈 거실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고른 맨션의 창문은 개인 카페에서나 볼 법한 통창에 얇은 쇠 프레임이었다.

그 틈새로 차가운 겨울바람이 집안 구석구석을 사정없이 파고들어 집을 냉골로 만들었다.


처음에는 창문이 안 닫혔다고 생각했고 그게 아닌 걸 알고 나서는 창문에 틈이 있나 살펴보기까지 했지만

그것도 아니라는 걸 깨닫고 기분이 조금 울적해졌다.


일본의 난방 방식을 찾아보니 에어컨 히터나 코타츠, 석유스토브 같은 생소한 이름들이 등장했다.

혹은 바닥 난방인 ”유카단보“가 설치된 집도 있지 만 안타깝게도 우리 집에는 없었다.

그마저도 보통 거실에만 설치한다는 말에 “왜?”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차가운 바닥에서 발이라도 따뜻할 수 있다면 감지덕지였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하루라도 빨리 집이 밝고 따뜻해져야 이 우울한 기운이 가실 것 같아 휴대폰을 들어 전등과 에어컨을 주문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전등은 가까운 대형 마트나 가구점에만 가도 바로 해결될 일이었지만 한국의 빠른 인터넷 쇼핑에 길들여진 내 사고방식은, 일본에서도 당연하다는 듯 스마트폰부터 켜게 만들었다.


다행히 전등은 내 예상보다는 빠르게 도착했지만 또 다른 문제가 내 발목을 잡았다.

천장이 너무 높아서 전등을 달 수 가 없었던 것이었다.

식탁은 다음 날 배송 예정이라 딛고 올라갈 곳조차 없었고, 관리실에 빌린 3단 사다리는 내 노력을 비웃듯 허공만 휘저을 뿐이었다.

결국 우리는 하루 더 휴대폰 불빛에 의지해야 했다.


어두컴컴한 방안 손가락으로 주전자와 강아지를 만들며 아이들과 그림자놀이를 하는데 문득 현타가 밀려왔다.

결혼 전에는 시간별로 여행 일정을 짜던 나름의 계획형 인간이었는데, 이곳에서는 한국보다 몇 배는 더 부지런하고 치밀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아이를 키우며 삶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배웠고 유연해졌다고 자부했지만, 일본의 생활 방식은 차원이 달랐다.

정해진 규칙이 무엇인지 부딪히며 알아내야 하는 과정, 그리고 그 규칙을 알아도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순간들이 마치 맞지 않는 옷을 여러 겹 껴입은 듯한 답답함을 주었다.


다음 날 식탁이 오면서 겨우 어둠에서는 벗어났지만, 이번엔 추위가 문제였다.


에어컨 배송까지는 일주일


그때까지 수면양말과 한국에서 가져온 전기장판으로 버텨보려 했지만 집안의 냉기는 상상 이상이었다.

차라리 재류자격(COE)이라도 나와서 한국에 잠시 다녀올 수 있다면 이 고생은 안 할 텐데, 소식은 감감무소식이었다.


"도대체 재류자격(COE)은 언제 나오는 거야? 인터넷으로 확인하는 거야?"


"아니 사무실로 편지가 와야 해."


"편지?"


"어, 편지"


"우체부가 배달하는 그 종이편지...?"


남편은 본인도 답답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등기도 아니고 일반 편지라니. 클래식하다고 해야 할까, 이 아날로그적인 기다림은 도무지 적응되지 않았다.

이러다 정말 입국 목적도 불분명한 뜨내기 신세로 남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함이 엄습했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정확히 일주일 뒤,

드디어 에어컨이 도착했다.

반가운 마음에 현관으로 달려 나가 설치 장소를 설명하려는데, 배송 기사님은 에어컨 본체는 팬트리에, 실외기는 현관에 덜렁 내려놓고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정중히 인사하며 문을 닫아버렸다


"어? 왜 그냥 가지? “


설치 기사는 따로 오는 건가 싶어 저녁까지 오매불망 초인종 소리에 귀를 기울였지만, 끝내 벨은 울리지 않았다.

분명 설치 포함 옵션이었고 설문 조사 메일에도 성실히 답변했는데 대체 뭐가 문제일까.

아이들과 저녁을 먹으며 스팸 메일함까지 이리저리 뒤진 끝에 범인을 찾았다.

“가장 빠른 날”로 자동 선택된 설치 희망일은 에어컨이 도착하고 무려 2주 뒤였다.

주문 날짜로부터 따지면 총 3주를 기다려야 에어컨을 달 수 있다는 소리였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적당히 기다려야지, 이게 정말 일상적인 일인 걸까? 여름도 아닌 한겨울에 왜 설치가 이토록 밀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머리로는 이 나라의 느린 속도를 납득해 보려 애썼지만, 시린 발끝까지 차오르는 짜증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낯선 땅의 느릿한 속도에 나를 맞추며, 2주 뒤에 올 온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일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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