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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 Nov 17. 2019

실연, 그 결정적 계기

우리는 살아가며 실패도 하고 상처도 받는다. 그럴 때마다 힘들고 괴롭지만, 실연(失戀)의 고통지수는 최상위급이었다. 한 사람이 머릿속에 24시간 생각난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고문인지 차여보니 알게 되었다. 사실 나는 이런 종류의 고통을 처음 겪었다. 그래서 그녀를 잊기 위해 스스로 나를 독방에 가두었다. 온라인 FPS게임을 하며 적을 사살하는 쾌감으로 고통을 잊으려 했다. 


그 당시 전쟁게임이 상당히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승리하면 잠시나마 즐거웠다. 몇 분 후에 잊고 있던 고통이 다시 찾아오면 잠으로 잊으려고 했다. 한시라도 빈틈이 보이면 그녀의 아름다운 이미지가 나타나서 지우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래서 무엇인가 몰두해야 했다. 다른 놈이랑 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고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었다. 



직장에서 나는 눈을 띄는 자리에 있었다. 나 자신이 지적 허영심이 들었을 때 그녀가 차고 들어왔다. 끌림도 여러 종류가 있다. 은근한 끌림, 잔잔한 끌림, 강력한 끌림 등 그중에 원펀치 끌림이었다. 그야말로 한방이다. 그때를 회상하면, 사랑의 스위치를 ON으로 올리는 느낌이다. 나는 자존감이 낮아 사람의 칭찬이 필요한 시기, 그 결핍 공간에 그녀의 칭찬 한마디가 차고 들어왔다. 


가장 결핍된 것을 채워주는 예쁜 그녀, 첫눈에 반하고 나는 그녀를 원했다. 의외로 나는 성질이 급했다. 연애감정이 극에 달하게 되었고 프러포즈를 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적이 나타났다. 그 적은 내가 다니는 직장의 사장. 금수저까지는 아니어도 은수저는 되었다. 나보다 젊고 키 크고 덩치도 있었다. 상남자 스타일에 리더십까지, 도저히 내가 이길 수 없는 스펙을 가졌다.


그녀의 이상형은 강한 남자다움, 캡틴 아메리카 형. 그와 달리 여리고 여성적 취향을 가진 나는 그녀가 평생 같이 살고 싶은 타입이 아니었다. 떠날 때 남자인 척 대범하게 보내주었다. 다음날 골방에서 숨어 지내며 잊으려고 갖은 수단을 다 동원했다. 게임을 하다 갑자기 울음을 터져 나왔다. 참으려고 발악을 해도 북받쳐 오르는 슬픔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불을 덮어쓰고 이를 악물고 울음소리가 새 나가지 않게 통곡을 했다. 당시 불현듯이 눈물이 터져 나온 것은 인내의 한계치가 도달했었다. 바보같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우는 내 모습이 싫었다. 로맨스 영화를 보다 보면 나오는 실연당한 남자 주인공, 속으로 저런 찐따 자식 하며 놀려댔는데.


그렇게 통곡을 하고 1년여 가까이 어두운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사소한 말다툼도 아니고 바람피운 것도 아니고 내가 아는 남자를 사랑해서 떠난 것이 억울하고 분했다. 이것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를 탓하고 세상을 탓했다. 어두운 곳에 있다 보니 우울증이 왔고, 내가 내 목을 조르니 좀비처럼 변해갔다. 




죽지 못해 사니 이 놈에 세상 망했으면 좋겠다. 마침 2019년 12월 지구멸망설은 아주 좋은 아이템이었다. 올커니! 인터넷 검색을 하며 그럴듯한 논리와 뒷받침될만한 근거를 찾아다녔다. 점차 멸망의 논리는 믿음으로 변해가고 비관론자가 돼버렸다. 그렇게 나의 내적 인격은 무너져갔다.


멸망의 날, 세상은 여전히 바쁘게 돌아갔다. 실연에 끌려들어 가서 나는 이제 괴수가 되어버렸다. 풍지박살이 난 내 인생, 어떻게 도로 정상화시켜야 할지 암담했다. 나이는 먹어가고 경력단절에 대인기피증까지,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실연의 동굴에서 벗어나 제정신이 들기까지 3년의 시간을 필요했다.  



그 강력한 끌림이 원망스러웠다. 어떤 철학자는 끌림이 사랑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할 때가 있다고 하는데, 경험해 보니 그 말이 맞았다. 그때 내 상태는 애정에 목말라했고 작은 칭찬에도 확 좋아했다가 작은 지적에도 상처 받고 침울해졌다. 불행지수가 지속되면 타인의 감정에 따라 내 감정이 흔들렸다. 내 주체를 타인에게 의지했다.


자존감이 약한 존재는 끌림이 파고들기에 딱 좋은 조건이었다. 별것 아닌 칭찬 한마디에 내 결핍을 채워주면 그 상대를 사랑하게 되다니. 우연히 그녀가 선택이 된 것인가? 무의식적으로 원하는 여성 타입에 딱 맞았을 뿐이다. 콩깍지가 씌면 상대의 성격과 모순을 알기가 불가능하다. 우리는 이때 결혼을 장려한다. 




만약 그녀와 결혼했다면 서로 생활습관과 단점들이 드러났을 때 갈등이 컸을 것이다. 연애의 경험치가 쌓일수록 끌림에 대한 냉철한 자세는 상대방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지만, 연애의 달달함은 거리가 멀어졌다. 나는 심사숙고한 끝에 첫눈에 반한 여자와 행복한 가정을 꾸리다는 생각을 버리게 되었다.


그것보다 내 결핍과 상처를 결혼으로 상대방에게 전가시키고 싶지 않게 되었다. 칭찬받기를 좋아하고, 조금만 잘해 주어도 그 사람에게 끌린다는 것은 내가 결핍의 구멍이 크다는 의미다. 그것을 채울 수 있는 것은 본인밖에 없다. 본인 노력 없이 상대가 채워줄 것이라는 생각은 불가능하다. 



누군가에 끌리기에 앞서 내 삶이 어떤 상태인지 되짚어봐야 했다. 강력한 끌림에 이끌려 들어간다면, 내 삶의 구원자와 파탄자의 선택지에 놓인다. 나는 파탄자를 선택했고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망가졌다. 끌림은 이토록 무서운 운명의 미끼와 같았다. 나는 끌림이란 이 의혹덩어리를 의심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끌리든 끌리지 않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끌림의 감정을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이 힘든 일이다. 끌림에 대한 분노하는 마음까지 있었다. 어차피 끌리는 감정은 지나갈 것이고, 이후가 중요한 법이다. 실연을 당했다면 당신은 끌림이 왜 일어났으며,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주의를 기울인다면 인생의 결정적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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