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디 Nov 17. 2019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 눈물

영화관에 가서 슬픈 멜로 영화를 보는데 나 빼고 모두 눈물을 흘렸다. 남녀 주인공은 관객들을 울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 연기를 하지만, 내 마음은 내내 불편했다. 짜증이 나고 눈물을 훔치는 관객들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았다. 그 이후로 절대 멜로 영화는 안 보기로 했다. 혹여 눈물을 짜내는 장면이 나오면 보다가 중단하기도 했다. 그때는 알 수 없었다. 내가 왜 슬픔을 불편해하고 외면하려고 했는지. 남자라서 그런 걸까? 의문이 들었지만 그렇게 지나갔다.



어느 날 혼자 극장에서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을 보았다. 포스터가 화려해서 밝은 영화인 줄 알았다. 극이 흐를수록 여주인공의 비극적인 결말에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흘렀다. 뒤통수 제대로 맞았다. 아무도 없었다면 통곡을 할 정도로 감정이 격해졌다. 흑흑 대면서 복받친 감정을 추스르고 극장 문을 겨우 나왔다. 제어할 수 없는 눈물에 당혹스러웠다. 눈물 흘리기 싫은데 내 몸은 따로 노는 웃기는 상황. 갑자기 내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시원하기도 하고 내가 왜 이런지 알 수 없었다. 이유를 알고 싶었다.


처음으로 내가 나를 진단했다. 눈을 감고 과거로 헤집어 보았다. 구멍가게 하시던 어머니와 해외로 나가 일하셔서 항상 부재중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나를 강하게 키우시길 원하셨다. 강한 생활력이 필요한 시대, 강해야 살아남는다. 그녀들은 눈물이 흘리는 남자아이는 약한 모습처럼 생각하셨다. 내가 말썽을 피우면 어머님이 항상 하시는 말씀,


"울면 안 돼. 울지 마". "남자는 우는 거 아니야!"


아이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기 위해 울지 않는 아이가 되어야 했다. 그때부터 나는 감정을 감추는 법을 익혀갔다.


"울지 않아야 사랑을 받을 수 있어. 눈물은 나쁜 거야."


그때부터 맞아도 울지 않았다. 울지 않는 착한 아이, 어른들은 칭찬했다. 아이는 자랄수록 감정에 갑옷을 장착하기 시작했다. 갑옷이 두꺼워질수록 조용하고 말수 없는 아이로 변해갔다. 고등학교 때 존재감 없이 주목받기 싫어하는 학생이 되었다. 카페에 가면 구석이 좋고, 주목받기 싫어하고, 사람의 눈을 쳐다보지 못하고, 심하게 감정 표현하는 사람들을 보면 불편하고 도망갔었다. 조금 과장하면 내가 로보캅이 된 것 같았다. 돌이켜 생각하면 깊은 인상을 남겨준 마츠코가 나를 무장해제시킨 셈이다.


마츠코는 모진 고통을 감수하며 아버지와 남자의 사랑을 받으려고 했다. 나는 울지 않는 강한 남자로 부모님과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했다. 마츠코와 나는 방식은 다르지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는 내 삶 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슬픔은 나에게 중요한 감정이 되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내 정신의 "우울함"이라는 꼬리표가 붙어가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연애에 몰두해 있었고, 여자에게 사랑받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연애감정은 나에게 심오한 계시와도 같았다. 그때 나는 새로운 인격이 드러나고, 한없이 약하고 볼품없던 나를 하나의 빛으로 재탄생하게 했다.


1년 후 빛은 꺼지고 내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옛 친구가 나를 방문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는 중에 친구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네 눈에 생기가 없다."


10년 만에 얻은 연애의 기회, 세상 무엇이든 다 줄 것 같은 충만함. 기쁨은 짧고 고통은 길었다. 조직생활의 미숙함은 자신감 없는 남자로 보였나 보다. 그녀는 회사 내 인기 있는 1등 신랑감에게 가고 말았다. 또 등수에 밀렸다. 실연으로 마음의 병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우울증은 그 순간부터 시작되었고, 1년 동안 은둔하며 지냈다. 무엇보다도 미움, 분노, 복수심, 슬픔이 올라와 나를 무척 놀라게 했다. 내 안에 없다고 생각했던 감정들이 내 머릿속으로 돌진함으로써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동안 깊숙이 쌓아놓은 찌꺼기들이 흙탕물처럼 내 안으로 흐려놓았다.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문을 닫았다. 마츠코가 쓰레기 더미가 쌓인 방에서 마지막을 보낸 것처럼 처참하게 찢겨가고 있었다.


그 당시 나의 의식세계는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돌이킬 수 없이 어둠 속으로 이끌려 가고 있음을 인식했다. 나는 자문해보았다.


"무엇이 이런 결과를 불러온 것일까?


결과는 의외로 단순했다. 마츠코와 나는 타인에게 의지하는 삶을 살았다. 경제적으로 힘들면 회사를 관두고 부모님에게 의지하고, 연애를 하면 사랑받으려고 여자에게 의지하였다. 진짜 내가 없었다. 최악의 남자와 꼴찌의 꼬리표는 끈질기다. 정신의 허한 시간이 지속될수록 무서울 정도로 몸값을 치르고, 진정한 나로부터 도피하는 결과가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이해하는 노력 없이 앞으로 돌진함으로써 탐욕으로 변질되었다. 몇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나는 영화를 보고 내가 불쌍하다는 감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그녀와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마츠코를 통해 나를 본 것이다. 나는 스스로 이렇게 고백했다.


"그래, 이제 슬플 때 울자"


어른이 되어서 울면 못난 놈처럼 보았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은 나는 슬픈 감정을 억압하는 일종의 환자였다. 감정은 인간의 중요한 표현 수단이며 영혼의 표정이다. 그것을 막는다는 것은 세상과 소통을 막는 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이런 모순적 상황들이 모여 나 자신을 잃게 만들었다. 지금에서야 나를 조금씩 이해하고부터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20년이 지나서, 우는 남자가 나쁘지 않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작가의 이전글 실연, 그 결정적 계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