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 번호를 누르면 기록을 조회할 수 있다고 한다. 요즘은 세상이 참 좋아져서 종이처럼 보이는 배번표에 스마트칩이 들어 있고, 이를 기반으로 출발과 도착을 판단하고 기록까지 알려준다. 몇 주 전 나는 지금 내가 몇 가지 상태 중 하나일 것이라고 예측했다.
컷오프에 걸리지 않고 10km를 완주한 공식 기록을 갖게 된 나
컷오프에 걸렸지만 어떻게든 10KM를 달려 태어나서 처음 10KM를 쉬지 않고 달리게 된 나
너무 힘들거나 몸이 좋지 않아 완주조차 하지 못했지만 대회 현장의 에너지를 뿜뿜 얻고 온 나
하지만 현재의 나는 셋 모두 아니다. 나는 집에서 책상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는 나다. 내가 기대하지 않았던 미래 중 하나가 관측되었다. 예측이 벗어날 것이라 의심되는 사건은 없었다.
2주일 전쯤부터 갑자기 머리가 띵하고 눈앞이 아득한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를 먹으면 증상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았고, 갈비뼈 중앙 하단이 묵직한 느낌이 지속되었다. 원래 소화가 잘 안 되는 편이라 일단 체기를 의심했다. 소화제를 몇 번 먹었는데도 나아지지 않았다. 어디선가 위도 근육이라는 말을 들었다. 속이 안 좋을 때 가만히 있으면 더 소화가 안 되는 느낌이라 달리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대회 나간다고 흥분하지 말고, 무리하지 말고, 다치지 말고, 달릴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면서 천천히 달려보자 생각하고 주 2회 정도 달렸다. 그리고 조금 쌩뚱맞지만 배구 원데이 클래스를 들었다. 신인 감독 김연경에 푹 빠져 있어서 나도 배구를 한번 해보고 싶었다. 달리기를 하니 몸을 움직이는 것에 재미를 느꼈는지, 다른 운동도 해보고 싶어졌다. 혹시 배구가 너무 무리인가 싶었지만, 초보 대상 수업이니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후기를 찾아보니 초등학생들도 많이 하고, 어렸을 때 체육 시간에 배구로 실기 시험도 봤던 기억이 나서 그 정도 수준이면 가능하겠다 싶었다. 실제로 수업은 뛰거나 달리는 것 없이 비교적 정적인 형태였고, 가장 큰 동작이 제자리에서 점프해서 스파이크하는 연습이었다. 토스를 하면서 팔목이 자로 맞은 듯 아팠던 기억이 강렬하게 남았다. 수업이 끝나고는 함께 수업을 들은 분들과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었고 집까지 산책 겸 걸어갔다. 속이 좋지 않아 커피를 며칠 끊었더니 밤에 눈이 계속 감겨 7~8시간 잠도 잘 잤다. 그동안 쌓여 있던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 들어 좋았다.
10KM 달리기 대회를 1주일 남긴 금요일이 되었다. 내 쇼츠와 릴스는 마라톤 대회 준비 영상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내게는 10KM가 마라톤처럼 느껴져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때까지 우려되는 건 10KM를 한 번도 달려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가장 장거리는 7KM를 8분 30초 속도로 달린 것이었다. 하지만 대부분 7~8KM를 달릴 수 있으면 대회 현장 분위기에 휩쓸려 10KM는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심지어 기록도 더 좋아질 수 있다고 했다. JTBC 마라톤 때의 경험(5KM를 처음 달린 날의 이야기로, 내가 참여한 건 아니고 우연히 집 앞 달리기 루트가 마라톤 대회 루트와 맞아 열기를 살짝 경험함)도 있어 컷오프는 무리 없이 면할 것 같았다. 모든 영상에서 대회 1주일 전 정도까지만 장거리를 달리고 그 후로는 아예 달리지 않거나 2~3KM 가볍게 달리는 것이 좋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조금 장거리(거리는 상대적이니까 당당한 마음으로)를 달려야겠다 싶어 토요일 아침에 8KM를 달리기로 하고 잠이 들었다.
토요일 아침이 되었다. 사정이 생겨 아침 달리기는 하지 못했다. 토요일 저녁이나 일요일 오전에 달리면 될 것이다. 그때까지 속이 좋지 않아 집 근처 병원으로 향했다. 그런데 갑자기 무릎 근처에 통증이 느껴졌다. 발을 내디디면 무릎 아래쪽이 욱신거렸다. 일단 고통을 참고 더 걸으면 또 나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다시 아팠다가 좀 나아지기를 반복했다. 너무 갑자기 아파서, 전날에 잠을 잘못 자서 그런가 싶었다.
일요일에도 통증이 이어졌다. 결국 마지막 달리기 연습을 하지 못했다. 아프니 무리하지 말고 1주일 푹 쉬고 대회에 나가야지 했다. 달리기는 못하겠지만 허벅지 단련은 해야 할 것 같아 대신 계단 오르는 훈련을 해야지 싶었다. 유튜브로 이것저것 찾아보고 오래 사용하지 않았던 요가 매트와 폼롤러를 꺼내 허벅지와 종아리 주변을 풀어줬다. 허벅지 옆 근육을 풀어줄 때는 걸었을 때 느꼈던 통증보다 더 센 통증이 느껴졌다. 2~3분 폼롤러를 사용했을 뿐인데 등에 살짝 땀이 났다. 바로 병원을 갈까 했는데 폼롤러의 효과인지 회복되고 있는 건지 아주 많이 아프지는 않았다.
월요일은 확실히 낫는 게 나을 것 같아 휴가를 쓰고 집에서 쉬었다.
화요일은 출근을 했다. 오전에는 거의 다 나았나? 싶었는데 오후가 될수록 무릎 외에도 다리 전체가 뻣뻣해졌다.
수요일 오전에는 병원을 다녀왔다. 의사 선생님은 허벅지 근육과 무릎 아래 뼈가 만나는 부분에 염증이 생긴 것 같다고 했다. "운동은 하면 안 되나요?" 하고 여쭤보니 운동하는 사람 중에 운동으로 극복하라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일반인인데 무리해서 운동하지 말고 1~2주 쉬라고 했다. 차마 하지 못한 말. "저 3일 후에 달리기 대회가 있는데요.." 물리치료를 받고 소염 진통제와 근육이완제, 위장 보호제를 처방받았다. 약도 먹으니 금방 낫겠지, 대회에서 무리하지 말고 걸어야지 생각했다. 일단 저녁까지만 기다려보자.
수요일 오후가 되자 갑자기 겨울이 찾아왔다. 약을 먹어서인지, 물리치료를 해서인지 통증이 살짝 줄어드는 느낌이었는데 저녁이 되어 찬바람을 맞으니 무릎이 뻐근해졌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서 씻고 누우니 그제야 실감이 났다. 이제 놓아줘야 하는구나. 다행히 좀 어른이 되었는지 눈꼬리에서 물줄기가 흘러내리지는 않았다. 사람은 쉬이 변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마라톤 참가비가 5만 원이었는데, 본전 생각이 나서 잠깐 속이 쓰렸다. 다행히도 내가 신청한 대회는 카카오페이와 션(옛날에는 가수였는데 이제는 달리기하고 기부하는 사람이 된 것 같다)이 콜라보한 것으로 참가비는 기부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내 이름으로 기부하지 않아 연말정산 혜택은 받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회사의 이름으로 좋은 일에 쓰일 것이었다. 게다가 완주하지 않더라도 대회 기념품으로 바람막이도 주고 양말도 주고 깔창도 주고 에너지젤도, 로션도 줬다. 완주한 사람에게는 추가 기념품도 있었다. 마케팅 차원에서 여는 대회였겠지. 이 때문인지, 달리기의 인기 때문인지 며칠만에 신청이 마감되었다. 선착순이라 나 때문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양도도 할 수 없고 참 누군가에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10KM를 달릴 거라면서 두근두근하던 날의 나, 조금씩 조금씩 거리를 늘려가며 10KM에 가까이 다가가던 나, 주변에 10KM 달리기 신청했다고 자랑하던 나... 제일 슬픈 건 못 뛰는 나지 싶기도 했다. 며칠만에 다 나을 거라고 기대했던 어리석은 나도, 설렘도 모두 놓아줬다.
지난 3주를 돌아보게 된다. 날이 추워져서 스트레칭을 훨씬 더 많이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근육이 제 기능을 하지 못했던 걸까? 평소에 운동도 잘 안 하면서 괜히 배구는 왜 해가지고 이 사단을 만드는가? 누가 기록을 내라고 한 것도 아니고 중간에 힘들면 포기해도 되니까 다치지 말고 달릴 수 있는 상태만 유지하자고 했던 사람 어디 있는가? 가장 첫번째 목표가 다치지 말기였는데 첫번째 목표도 이루지 못했구나. 뒤로 누웠다, 왼쪽으로 누웠다, 앞으로 누웠다, 뒤로 누웠다, 오른쪽으로 누웠다. 후 하고 한숨 쉬고 눈을 껌뻑이고 악 하고 짧은 숨을 내쉬고 다시 몸을 뒤집었다.
아주 신나게 놀다가 늦게 자고 일어나려고 했지만 최근의 바른생활 덕분에 눈 뜨니 8시 30분 정도였다. 유튜브를 좀 보다가 밀린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걷었다. 조금 움직였는데 무릎이 뻐근해지고 마음은 허전해졌다. 문득, 어쩌면 글을 쓰기로한 목표는 여전히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책상 앞에 앉았다. 지금 이 기분과 상황을 글로 남겨두자. ‘토요일에는 10KM 달리기를 하고 집에 돌아와서 뻗었다. 일요일에 아픈 종아리와 허벅지를 두드리며 이 기분을 기록한다’ 같은 글을 쓸 줄 알았다. 현실은 ‘10KM 달라기를 아예 시작도 하지 못했다’를 적고 있다. 오늘 쓴 글을 찬찬히 읽어보니 ‘못 달렸다’는 ‘달렸다’만큼, 아니 더 매력적인 글감이라는 생각도 든다. 내가 글을 잘 썼다는 의미가 아니다. 무언가를 이룬 사람의 글을 읽으면 자극을 받지만 무언가를 이루지 못한 사람의 글을 읽으면 위로를 받게 되지 않나. 두서없이 휘갈긴 언젠가의 일기를 보며 ‘아, 내가 그랬었지’하며 기쁨도 아쉬움도 모두 지나가니 하루 하루 울고 웃으며 살아내자 생각하지 않나.
J보다 P가 강하지만, 동시에 S보다 N이 매우 강한 탓에 계획인지 상상인지 모를 생각을 많이 한다. 처음 달리기를 주제로 글을 쓰려고 했던 때, 5KM를 처음 달린 날, 10KM를 처음 달린 날을 기록해야지 했다. 달리기로 두 가지 정도 꼭지의 이야기를 풀어내면 충분하겠지 싶어 미리 목차도 그렇게 써두었다. 3주 전에 10KM 대회를 신청한 날의 이야기를 적었고, 오늘 참가도 못한 10KM 대회 날의 이야기를 추가했다. 무릎 부상을 겪으면서 느낀 생각과 10KM 대회를 다시 준비하는 날들과 10KM 대회를 완주한 날의 기록을 남기는 나를 상상하게 된다. 이대로 나의 달리기가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의사 선생님은 1~2주 정도 쉬면 많이 나아질 거라고 했다. 이제 서로를 막 알아가려고 하는 상황에서 금지된 상황처럼 달리기의 재미를 막 알기 시작할 때 할 수 없게 되어 더 애가 탄다. 어차피 추울 때 달리는 것을 선호하지 않으니 겨울동안은 부상을 회복하면 된다. 몇 달 혹은 몇 년 동안 풀코스 마라톤을 준비하다가 다친 것도 아니고 고작 몇 주였다. 몇 번 달리지도 않았으면서 10KM 대회를 나가겠다고 한 것 자체가 무리여서 누군가 워-워-했는지도 모른다. 이 상태로 완주를 했다면 지금보다 더 큰 부상을 얻었을 수도 있다. 철저하게 회고해서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발목, 허벅지, 허리 등 달리기에 필요한 근력과 지구력을 키울 수 있는 계기로 삼자. 겨울이 지나가고 나를 기다리는 건 벚꽃이 흩날리는 봄의 달리기니까!
추신)
실제로 경주에서는 벚꽃이 피는 4월에 벚꽃 마라톤대회가 열린다. 웹사이트 주소가 체리 마라톤(https://cherrymarathon.co.kr/)이다. 이 얼마나 몽글몽글한가! 2026년 대회는 2025년 12월에 신청을 한다. 운명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