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보다

서부지법 폭동

by 작은별


주말 아침 일찍 뉴스를 접했다. 뉴스를 접하곤 더 이상 잠에 들 수가 없었다. 누워있는 몸에 우울감이 내려앉으며 침대에서 일어나기가 어려웠다. 뉴스를 보면서 울컥울컥 올라오는 걸 참을 수 없었다. 너무 화나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뉴스에서 접한 영상은 충격적이었다. 광기에 둘러싸인 사람들이 소화기나 각종 장비를 들고 창문을 깨부수었다. 산산조각 난 창문을 뜯어내고 법원으로 침입했다. 법원 사무실에 있는 집기를 손에 닥치는 대로 집어던졌다. 윤석열 대통령에게 영장을 발부한 판사를 찾겠다고 온 층을 헤매고 돌아다녔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을 보면, 이들은 영장전담판사 사무실의 위치를 알고 있었고, 실제 영장판사실 문을 부수고 침입하기도 했다. 일 때문에 법원을 자주 가고, 판사들을 종종 만날 일이 있어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최근 들어 나는, 문득 사람들이 그렇게 외치던 '자유 민주주의' 따위가 끝난 게 아닐까란 생각을 종종 했다. 대학시절 괴짜라고 여겼던 교수님의 말이 10년이 훌쩍 지난 요즘 들어 또렷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교수님은 투표를 안 한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민주주의 신봉자였다. 민주주의란 게 뭔지는 모르지만(지금도 잘 모른다), 엄청나게 '선한' 것이고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 중 하나가 선거라고 생각했다. 국민의 대표적인 기본권인 투표권을 행사 안 한다고?! 나한텐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 교수님 말은 이랬다. "어차피 그놈이 그놈이야. 선거는 착각이야."


그 교수님의 말의 진의를 요즘 들어 조금은 이해하게 된다. 선거로 우리가 원하는 후보를 뽑는 것 같은 효능감을 느낄 순 있지만, 누구를 뽑든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 특히 진보와 보수당의 특징이 흐릿하고 양당체제가 확고한 우리나라에선 사람들이 원하는 후보 선택지가 적다. 후보들은 이미 기득권 체제 안에 있는 사람이고 우리가 누구를 뽑든 기득권 그대로 돌아간다. 마치 우리가 그들을 '선택'했다고 착각하고. 그냥 놓인 선택지 중에 하나를 골랐을 뿐인데 말이다.


환상이 깨어져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우리가 그나마 조금 더 나은 정치체제라고 믿고 선택했던 게 무너지고 있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근간이라고 여겨지는 사법부가 피로 물들었다. 모든 갈등이 법원으로 가기 시작했을 때부터가 붕괴의 전조였을지도 모르겠다. 정치가 스스로 해결할 일을 해결하지 못하고 법원으로 보내놓고, 법원이 판단한 것도 믿지 못해서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물론 당연히 법원조차 완전하지 않다. 판결이나 결정도 사람이 하는 일이다. 판사라는 이름의 그 사람도 온갖 선입견에 물들어있을 수도 있고, 이상한 가치관을 갖고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재판도 단심제가 아니고 3번의 기회를 주는 거다. 누군가 잘못 판단했을 순 있지만 그걸 정정하고 고쳐나갈 기회를 주는 거다. 그리고 사람들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만든 제도를 믿고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를 지탱하는 제도가 무너지는 건 한 순간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세상이 됐다. 아무리 사실을 확인해서 알려줘도 도무지 믿질 않는다. 사실이란 단어의 힘이 무너지고, 음모론만 기세양 양한 세상이 됐다. 사실의 힘이 무너진 시대지만, 엄연히 사실은 존재한다. 그 사실들이 하나하나 모여서 진실을 이룬다. 사실을 말해도 '거짓'이라고 하니, 같은 언어를 사용해도 소통을 할 수가 없다.


항상 처음은 어렵다. 법원 폭동 사건은 민주화 이후 처음이었다. 그런데 처음이 어렵지, 이런 일이 당연하게 반복될까 봐 무섭다. 우리가 디뎌온 세상이 무너져가는 지금, 붕괴를 지켜보느냐 깨진 조각을 다시 붙이느냐의 분기점이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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