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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별 May 19. 2021

할머니의 장례식

코로나, 딸들


#1


  코로나가 퍼진 지 어언 1년 반이 돼간다. 지난해 1월부터 시작된 코로나 사태는 끝날 듯 말 듯 이어지고 있다. 직장인인 나는 코로나 피해를 거의 겪지 않았다. 전국의 자영업자들과 일용 노동자들 등 수많은 사람들이 먹고사는 문제에 힘겨워할 때, 항공사와 여행사를 다니는 친구들이 회사에서 쫓겨날 때도 나는 그나마 안전했다. 큰 회사는 아니었지만 나는 매달 월급을 꼬박꼬박 받았고 때로는 재택근무를 했다. 내가 코로나를 느낄 땐 매일 아침 마스크를 챙길 때였다. 그 정도 불편함은 다른 사람들이 겪는 삶의 힘겨움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었다.


  코로나로 가족을 잃고 직장을 잃은 사람들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돼 갈 때쯤, 그건 내 이야기로 돌아왔다. 3년여 전 낙상으로 요양병원에 계시던 할머니가 코로나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첫 사흘 정도는 별다른 증상이 없었다. 할머니 나이는 93세였다. 또래 노인들이 모두 틀니를 할 때 할머니는 본인 치아가 다 있을 정도로 건강했다. 걷는 데 조금 불편함을 느꼈을 뿐 정신도 또렷했다. 그래서 가족들은 할머니 연세가 많으심에도 훌훌 털고 일어날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며칠 뒤 상황은 달라졌다. 할머니의 건강함은 그의 또래에 비해 상대적인 것이었다. 코로나라는 무서운 질병 앞에서 세월은 피해 갈 수 없었다. 급격히 병세가 악화돼 할머니는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누구에게나 가족을, 특히 '엄마'라는 존재를 잃는 일은 가슴 아프다. 하지만 할머니의 죽음은 그에게나 가족 입장에서나 조금 더 비극적이었다. 딸들은 할머니를 만날 수 없었다. 면회는 금지됐다. 막내딸인 엄마는 그나마 중환자실 간호사의 선의로 할머니와 영상 통화를 했다. 할머니 의식은 뿌연 상태였지만 그래도 엄마는 '사랑한다'는 말을 전했다. 할머니가 코로나에 걸린 뒤 첫인사였지만, 그렇게 마지막 인사가 돼버렸다. 죽은 할머니는 가족들과 마주하지 못한 채 불에 타 재가 됐다.


#2


  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장지까지 따라간 건 오랜만이었다. 할머니의 재는 손주 사위 1이, 영정사진은 손주 사위 2가 각각 들었다. 손주 사위들은 할머니의 아들인 외삼촌 딸들의 남편이었다. 그리고 합장을 위해 모셔온 수십 년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재를 큰 이모 아들인 사촌오빠가 들었다. 외삼촌이 몇 년 전 세상을 뜬 탓에 외삼촌의 자리를 사위들이 채웠다.

 

  왜 딸들이 셋이나 있는데 손주 사위들이 앞장섰는가, 이 의문은 나를 불편하게 했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자가 피 섞인 여자들 대신 할머니 할아버지 재가 담긴 항아리를 들었다. 하지만 아무도 의문을 갖지 않았고, 자연스러웠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재와 흙을 뒤섞고, 항아리에 담은 뒤에 땅속에 넣었다. 가족들이 순서대로 삽으로 흙을 퍼서 할머니 할아버지의 빈 공간을 채우는 일이었다. 이 절차를 진행하던 아저씨는 '장손이 있느냐' '손주가 있느냐'라고 물었다. 그렇게 큰 이모 대신에 그의 아들인 손주가 첫 삽을 떴다.  누군가는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길지 모르지만, 나는 그게 딸들에 대한 차별로 느껴졌다. 아무렴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엄마를 잃은 슬픔이 사위와 손주들의 그것에 미치지 않을까.


  옛날 사람들이 그랬듯, 할머니도 아들을 끔찍하게 아끼는 분이었다. 그 밑으로 딸을 줄줄이 셋이나 뒀지만 딸들은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외삼촌은 할머니의 애정도, 재산도 모두 받았다. 아들 사랑은 대대로 이어졌다. 외삼촌 외숙모가 자식을 셋 둔 것도 할머니의 아들 사랑 때문이라고 들었다. 장손이 아들로 대를 이어야 한다는 뿌리 깊은 생각은 이들을 가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딸만 셋을 낳았다. 그리고 할머니 장례식에서도 '아들'들은 피 섞인 딸들보다 우선했다.


  아들이, 사위가 딸들에 우선하는 장례는 언제쯤 끝을 맺을 수 있을까. 우리 집은 딸만 둘이다. 엄마 아빠가 죽는 그날에 나랑 동생이 결혼해 사위가 있을진 모르겠다. 하지만 사위가 있더라도 내 부모의 영정사진과 재는 꼭 내가 들리라, 하고 다짐했다. 부모를 뒤덮는 흙도 손주가 아닌 딸들이 먼저 덮을 거다. '아들'들의 들러리가 되지 않고 딸로서 의연하게 부모를 모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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