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를 지켜주는 마음

몰래 보면 안 씁니다

by 한걸음

글쓰기는 일기로부터 시작되었다. 친구와 돌려가며 소설을 쓰기도 하고 타학교 학생과 서로 주고받는 편지 형식의 노트를 쓰기도 했지만, 시작은 일기였다.

아무도 보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마음을 털어놓았다. 친구에게도 엄마에게도 하지 못하는 그런 말을... 말하자면 자기 고백이었고 나와 나누는 대화였으며, 대나무숲 같은 것이었다. 두서없이 써도 평가받지 않았고, 욕을 쓰더라도 비난받지 않았다. 누구를 좋아한다는 말도 소문날 염려 없이 마음껏 외칠 수 있었다. 해방구 같았던 문을 닫아버린 건 아빠가 일기를 본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였다.

“아빠가 없으면 우리 집이 더 행복할 것 같다. 오빠, 엄마, 나 이렇게 셋이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쓴 글을, 늘 내 일기를 염탐하던 아빠와 엄마가 보고는 충격받았던 것이다. 나중에 아빠가 그 글을 보고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엄마가 내게 전했을 때 나도 얼마나 놀랐는지. 허술한 자물쇠를 열고 내 일기장을 훔쳐본다는 걸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내가 어리석었다. 너무하다. 이건 나와의 비밀인데.

하지만 한편으론 잘됐다고 생각했다. 내가 아빠를 싫어하는 사실을 아빠가 알게 되다니 한편으론 속 시원하고 한편으로는 통쾌했다. 나는 늘 아빠의 눈치를 보며 잘 보이려고 노력했던 딸이었기 때문이다. 아빠의 고함과 분노를 피하기 위해 애쓰던 모습을 이제 억지로 연기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싶어 안도감이 들었다.

직접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글로 쓰고, 누군가는 몰래 읽고 상처받고, 누군가는 재미있다며 킥킥거렸겠지만 나는 그 이후로 더 이상 일기를 쓰지 않았다. 독자를 원한 것이 아니었다. 내면의 고백이었기에 나 외에 누구도 일기장을 펼쳐보기를 원하지 않았다. 초대하지 않은 독자가 늘 일기 뒤에 숨어 있었다는 것이 글을 멈추게 했다.

그 쓰다만 일기장을 엄마가 보관하고 있었다. 엄마는 얼마든지 쓸 수 있는 건 절대 버리지 않는 사람이다. 아까워서 남겨뒀겠거니 여기며 펼친 일기장에는 한참 남은 종이 위에 엄마가 자기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었다. 내 일기인 줄 알고 열어보다가 발견한 엄마의 글씨 위에는 눈물이 떨어져 얼룩져 있었다. 자식에 대한 미안함과 자신의 기구한 삶을 애처롭게 여기는 말들이었다. 뭐든 해낼 수 있다고 말하는 강인한 엄마도 약하고 여린 사람이구나 싶어 마음이 아렸다. 그리고 일기를 의도치 않게 몰래 보게 되어 미안했다.


‘나는 분노의 글을 썼는데 엄마는 눈물의 글을 쓰는구나. 우리는 이렇게 서로 일기장 하나를 공유했네. 엄마도 나도 상처받은 마음을 누가 어루만져주었으면 하면서 이렇게 혼자 묵묵히 견뎌내고 있네.

이제 나는 엄마의 일기를 지켜줄게. 엄마의 슬픔도 엄마의 고통도. 안다면 우리가 서로를 위로할 수 있을까, 입 밖으로 내지 않은 말을 몰래 보는 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까? 말하지 않은 건 지켜달라는 의미로 알게, 엄마도 내 마음을 지켜줘.’


이제는 서랍 아래 엄마의 일기장이 놓여있다는 것을 알지만 열지 않고 보지 않는다. 그것이 내가 엄마에게 하는 최대한의 배려이고, 내가 받고 싶었던 최선의 존중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