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얼 세대의 에스티 로더
글로시에(Glossier)는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핫한 화장품 브랜드 중 하나입니다. 밀레니얼 세대의 에스티 로더(Estee Lauder)라고 불리는 이 브랜드는, 2014년 말 론칭한 이래 매년 세 자릿수 이상의 성장을 거듭하고 있어요. 글로시에의 기업가치는 무려 1.2조 원. 2018년 연매출은 1,000억 원입니다.
그런데 글로시에의 창업주는 화장품을 전공한 적도 화장품 업계에서 일한 적도 없어요. 패션 분야에서 일해왔고, 패션 스타일리스트 밑에서 어시스턴트로 일했던 게 최종 경력일 정도로 커리어가 화려하지도 않았죠. 실제로 나이도 만 34살로 어린 편이에요. 게다가 글로시에는 우리가 흔히 접하는 블로그에서 탄생한 브랜드죠.
화장품 경력도 없는 젊은 창업주가 블로그에서 시작한 브랜드가 어떻게 이렇게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요?
글로시에의 성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20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해요. 글로시에 성공의 토대가 된 블로그가 그때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죠.
당시 글로시에 창업주 에밀리 와이즈(Emily Weiss)는 보그(VOGUE) 매거진 패션 스타일리스트의 어시스턴트로 일하고 있었어요.
와이즈는 스타일링 업무 때문에 모델 촬영장에 자주 나갔고, 거기서 수많은 셀럽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죠. 하루는 한 네덜란드 모델이 촬영을 하는 날이었는데, 모델이 태닝한 피부가 너무 예뻤대요. 자연스레 모델과 태닝 이야기를 나누면서 와이즈는 패션과는 다른 화장품만의 매력을 발견했다고 해요. 바로 ‘내가 쓰는 화장품 이야기’는 누구나 공감하기도 쉬우면서 유용하다는 점이었어요.
패션모델과 내가 입는 옷이 같기는 어렵잖아요. 그런데 화장품은,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제품이라면, 패션모델과 내가 쓰는 화장품이 겹칠 확률이 훨씬 높죠. 그래서 내가 어떤 화장품을 사용해본 후기는 남들에게도 의미 있는 정보이자 재미있는 대화 소재가 되어요.
와이즈는 그래서 화장품 그 자체보다도 화장품을 쓰는 사람들에 초점을 맞춘 뷰티 블로그를 운영하기로 했어요. 그렇게 뷰티 블로그 인투 더 글로스(Into the Gloss)는 2010년 가을 처음 문을 열었죠.
블로그는 빠른 속도로 인기를 얻기 시작했어요. 가장 인기 있는 코너는 더 탑 쉘프(The Top Shelf)라는 코너였는데요. 사람들이 욕실 선반에 놓고 매일 쓰는 화장품 사진과, 그들만의 화장품 사용법 그리고 피부 고민에 대한 솔직한 인터뷰가 담겼죠. 와이즈는 직업적 강점을 활용해서 킴 카다시안(Kim Kardashian), 바비 브라운(Bobbi Brown), 칼리 클로스(Karlie Kloss) 같은 유명 인사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욕실 사진도 블로그에 올렸어요.
구독자들은 인기 연예인이 샤넬(Chanel)뿐 아니라 대중적인 바셀린(Vaseline)도 함께 쓴다는 사실에서 묘한 해방감을 느끼기도 했고, 자신과 똑같이 여드름으로 오래 고생한 슈퍼모델 이야기를 들으면서 공감도 했어요. 그러면서 구독자 자신들의 이야기를 댓글로 공유하기 시작했죠.
구독자수는 순식간에 월 백만명을 돌파했고, 와이즈는 처음엔 직장생활과 병행하던 블로그를 나중엔 풀타임으로 운영하기에 이르러요. 블로그를 시작한 지 4년이 지난 후, 와이즈는 마침내 뷰티 브랜드 글로시에를 론칭하죠.
글로시에가 성공한 이유는 크게 2가지예요.
먼저, 글로시에는 관객의 위치에 있던 일반 소비자를 무대에 세웠어요. 보통 인플루언서가 말하고, 일반 소비자는 인플루언서의 이야기를 듣고 반응하는 방식으로 브랜드가 알려지는 경우가 많죠. 그런데 글로시에는 반대예요. 듣고 반응하는 위치에 있는 일반 소비자를 말하는 위치로 끌어올렸어요.
글로시에는 일반 소비자들이 블로그와 인스타그램 등에서 말하는 내용을 바탕으로 화장품을 만들거든요. 지금껏 주로 듣는 포지션이었던 일반 소비자가 말하는 사람이 된 거죠. 평범한 소비자인 내가 한 말이 제품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본 사람들은 글로시에라는 브랜드에 내 브랜드 같은 특별한 애착을 느끼게 될 거예요.
지금도 글로시에는 일반 소비자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세심하게 노력하고 있어요. 대표적으로 글로시에에서는 슬랙(Slack)이라는 업무 공유 채널에 글로시에 상위 100명의 사용자를 초대해서 그들이 서로 자유롭게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해요. 사람들은 거기서 주당 1,000건의 메시지를 주고받고, 글로시에는 이들의 대화를 제품 생산에 반영하죠.
글로시에 제품 중 하나인 프라이밍 모이스처라이저 리치(Priming Moisturizer Rich) 페이셜 크림 역시 소비자들의 댓글을 토대로 출시된 제품이에요. 글로시에 인스타그램에서 팬들에게 모이스처라이징에 대해 질문했고, 사람들이 1,000여개의 답글을 남겼거든요. 그 답글을 바탕으로 페이셜크림이 만들어진 거죠.
일반 소비자를 얼마나 중요시하는지는 글로시에 홈페이지에서도 드러나요. 우선, 홈페이지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일반 소비자들이 글로시에 제품을 어떻게 쓰는지 자신만의 언어와 사진으로 공유한 콘텐츠가 자리해요. 보통 다른 브랜드에서 이런 콘텐츠를 올리는 경우에는 ‘우리 브랜드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쓰는 인기 있는 브랜드’ 임을 알리기 위한 홍보 목적이 많죠. 그런데 글로시에는 그 브랜드를 쓰는 사람과 그 이야기에 더 집중하게 해요.
더 인상 깊은 점은 글로시에에서 구매후기를 보여주는 방식이에요. 보통 브랜드 홈페이지의 구매후기는 브랜드 홍보용으로 쓰이죠. 그래서 좋은 후기만 강조되거나, 구매후기의 많은 숫자가 강조되는 경우가 흔해요. 그런데 글로시에에서는 가장 추천을 많이 받은 만족 후기와 불만족 후기를 나란히 띄워요. 별점의 평균값까지 보여주죠. 평점이 3점대에 불과한 제품도 정말 많은데 말이에요. 즉, 사람들의 후기가 제품을 돋보이기 위한 도구로 쓰이는 게 아니고, 대등한 위치에서 제품을 평가하고 있는 거죠.
두 번째는 글로시에의 브랜딩이에요.
와이즈는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죠. “브랜드는 정말, 정말로 중요합니다. 거의 전부나 마찬가지죠. (Brand is really, really important. It’s kind of everything.)”
그만큼 글로시에는 일관적인 브랜딩을 해오고 있어요. 먼저 글로시에 특유의 연한 핑크색은 글로시에에서 워낙 광범위하게 사용해 ‘글로시에 핑크’라는 애칭으로 불릴 정도이죠. 제품 용기뿐만 아니라 매장 직원 유니폼, 글로시에 인스타그램 등에서 글로시에 핑크는 두드러져요.
메이크업한 듯 안 한 듯 내추럴한 얼굴의 모델들은 글로시에라는 브랜드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이 뭔지를 일관적으로 보여줘요. 은은하게 광이 나는 자연스럽고 건강한 피부를 추구하는 브랜드답게, 제품의 발색 또한 모두 연하고 자연스럽죠. 광이 나고 촉촉한, 글로시한 느낌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마케팅 문구들도 특유의 친구 같은 격의없고 재치있는 톤으로 일관되게 쓰여서, 글로시에 하면 떠오르는 말투와 톤도 있죠. 글로시에라는 브랜드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줘요.
브랜드 컨셉이 이렇게 명확하게 전달되다 보니, 소비자들은 글로시에와 상관 없는 사진에서도 글로시에를 떠오르기에 이르죠. 아래는 일반 소비자가 올린, 글로시에를 쓸 것만 같은 강아지 사진이에요. 글로시에라는 브랜드를 아는 사람들은 다들 공감할 거예요. 이렇게 일관되게 브랜드 컨셉이 전달되고 있는 거죠.
유통채널에 있어서 다이렉트 판매만 하는 것도 일관된 브랜드 경험을 주기 위한 노력일 거예요. 온라인으로는 글로시에 홈페이지에서만 판매하고, 오프라인으로는 전 세계에서 매장을 단 2개만 운영하고 있거든요. 보다 많은 유통 채널에 전개하면 매출이 지금보다 더 확대될 텐데, 브랜드 경험과 철학을 위해 그러지 않는 것으로 보여요.
미국 화장품 매출의 절반 가까이를 담당하는 아마존을 포기한 건 과감한 결정으로 생각돼요. 물론 오프라인 매장은 현재보다 접점을 더 늘릴 것 같긴 하지만요. 3월에 오픈한 마이애미 팝업매장을 시작으로 올해 안에 5개 팝업 매장을 신규 오픈할 예정이라고 하거든요.
앞으로 글로시에는 어떤 길을 걷게 될까요?
최근에 있었던 가장 큰 변화는 글로시에에서 올해 3월에 새로운 메이크업 라인을 론칭한 거예요. 글로시에 플레이(Glossier Play)라고 불리는 이 라인은 통통 튀는 색조 메이크업 위주로 선보이고 있죠.
사실 현재 평가가 좋지만은 않아요. 제품력은 둘째치고 포장이 과하다는 지적이 많거든요.
개성 있는 색깔의 색조라인인 글로시에 플레이가 기존에 글로시에가 추구하던 자연스러운 메이크업이라는 브랜드 컨셉을 희석시킬 수 있겠다는 걱정도 돼요. 글로시에라는 이름을 빼고 아예 새로운 브랜드로 출시했으면 어땠을까 싶고요.
다행인 점은 글로시에가 이번에도 역시 소비자의 의견을 기민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에요. 최근에 패키징에 대한 지적을 받아들이고 줄이겠다는 의사를 표명했거든요.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소비자의 피드백을 받으면서 계속 발전해갈 수 있겠죠.
글로시에의 제품들은 사실 가격 대비 용량이나 퀄리티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해요. 그럼에도 시그니처 제품 보이 브로우(Boy Brow)가 30초에 한 개씩 팔리는 등 많은 제품이 계속 인기를 얻고 있다는 건, 글로시에 특유의 철학과 운영방식이 사람들을 매료시킨다는 뜻일 거예요.
글로시에는 앞으로도 사람들이 화장품 이야기를 즐겁게 나눌 수 있는 커뮤니티를 구축하고 강화하는 데에 초점을 맞출 것이라고 해요. 그러한 커뮤니티의 결합 속에서 수익을 창출할 거고요. 인기 있을 때 브랜드를 여러 곳에 빠르게 전개해 매출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쓸 수도 있을 법한데, 글로시에의 철학을 지켜가는 방향으로 길게 보고 운영한다는 점이 대단해 보여요.
글로시에라는 브랜드를 느끼기 위해 써보시길 추천하는 제품은 클라우드 페인트(Cloud Paint)라는 치크 블러셔예요. 우리나라 사람들 사이에서 만족도가 높은 제품인데요. 크림 타입인데 얼룩지지도 않고, 수채화 같이 은은하고 맑게 발색돼요. 글로시에가 추구하는 자연스러운 메이크업이 무엇인지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 이 글은 제가 티알앤디에프 외부필진으로서 작성한 글입니다. 무단전재·재배포는 금지됩니다. 잘 읽어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