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에무라의 창립자 우에무라 슈(Uemura Shu)는 1928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습니다. 명문가 출신의 부잣집 아드님이었죠. 신사복용 섬유를 취급하는 회사의 설립자였던 할아버지와 문학을 사랑하는 예술인이었던 아버지 덕에, 경제적으로 윤택하면서도 자유로운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습니다.
우에무라 슈는 어릴 때부터 장난꾸러기였는데 커서도 유머가 넘치고 열정적이었습니다. 학창 시절에는 배우를 꿈꿨죠. 무대 위 스포트라이트와 두근두근하는 긴장감을 사랑했던 그는 수많은 연극 공연에 올랐고, 20대 때에는 연극단의 일원으로 지방에서 공연을 돌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20대 초반에 폐결핵에 걸려 무려 5년을 병상에서만 지내게 되죠. 그는 체력 소모가 큰 배우라는 직업은 건강 문제로 더 이상 좇을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면서 “체력이 별로 필요 없으면서 남이 하지 않은 일이 무엇인가를 매일 생각”하게 되죠.
결론은 바로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연극배우로 활동하던 시절 우에무라 슈는 과장된 연극 분장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거든요. 그는 과감하게 당시 금남의 영역이었던 도쿄 뷰티 아카데미(Tokyo Beauty Academy)에 입학하죠. 아카데미의 130명 학생 중 유일한 남성으로 말입니다.
그러다 1957년, 그가 스물아홉이던 해,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죠. 당시 할리우드 영화 <나비 조(Joe Butterfly)>가 일본에서 일부 촬영을 했는데, 남성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필요로 했던 겁니다. 유일한 남성 메이크업 아티스트였던 우에무라 슈가 자연히 할리우드 배우들의 메이크업을 담당하게 되었죠. 이 일을 계기로 그는 할리우드에서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어시스턴트로 일하기 시작하게 된 겁니다.
그렇게 5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습니다. 우에무라 슈는 열심히 일했지만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어요. 태평양을 건너 머나먼 미국에서 오래도록 일을 하는데도 이름을 알리기는 너무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1962년, 그가 34살일 때 결정적 기회가 찾아왔죠. 당시 할리우드 영화 <나의 게이샤(My Geisha)>가 촬영 중이었는데요. 주인공 셜리 매클레인(Shirley MacLaine)의 담당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병에 걸리게 된 겁니다. 우에무라 슈는 그를 대신하여 매클레인을 메이크업하게 되죠.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셜리 메클래인은 붉은 머리의 백인 여배우였는데, 우에무라 슈의 손길을 거친 뒤에는 누가 봐도 일본의 게이샤 같은 모습이 된 거죠. 마법 같은 변신에 사람들을 찬사를 보냈습니다. 이 메이크업을 계기로 우에무라 슈는 마침내 할리우드에 공식적으로 입성하게 됩니다.
이후 우에무라 슈는 할리우드에서 가장 인기 있는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자리매김합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 프랭크 시나트라 같은 할리우드 대표 저명인사들의 메이크업을 하며 커리어를 쌓아갔죠.
1964년에는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 L.A.)에 메이크업 스튜디오를 열기도 했습니다. 그의 메이크업 스튜디오는 당시 엘에이에서 가장 핫한 곳이었다고 하죠. 할리우드에서 가장 주목받는 메이크업 아티스트에, 가장 인기 있는 메이크업 스튜디오 오너. 미국에서 우에무라 슈의 삶은 너무나 성공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에서 배운 것들을 일본이라는 무대에서 더 큰 스케일로 펼치기로 한 겁니다.
당시 미국 경제는 다른 나라가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인 규모를 자랑했습니다. 자연히 다른 나라들에서는 미국 것들을 열망했죠. 우에무라 슈는 여기에서 기회를 보았습니다. 일본 역시 미국을 동경하는 건 마찬가지였으니까요. 게다가 일본 경제는 기적이라 불릴 정도로 가파르게 성장 중이기도 했고요.
할리우드에서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활동하던 우에무라 슈 눈에 가장 띈 건 여배우들의 피부였습니다. 당시 할리우드 배우들은 늘 찜통같이 덥고 먼지로 가득한 지저분한 스튜디오에서 메이크업을 받을 수밖에 없었죠. 게다가 여배우들은 거기서 특수 분장 수준으로 두꺼운 화장을 해야 할 때도 있었고요.
이런 환경에서는 아무리 튼튼한 피부라도 손상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화장을 할 때보다 지울 때 여배우들의 피부가 많이 손상되었고요. 여배우들은 진한 메이크업을 지우기 위해 식용 기름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깨끗하게 지워지지도 않고 피부에 자극도 남았습니다.
우에무라 슈는 식용 기름이 화장을 지우는 데 쓰일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해, 식용 기름을 클렌징 제품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연구를 하죠. 그렇게 그가 만든 클렌징 오일은 1960년에 첫 선을 보이고, 할리우드 여배우들에게 검증받은 뒤, 우에무라 슈가 일본 메이크업 주식회사를 설립한 1967년에 공식적인 제품 언마스크(Unmask)로 세상에 나오게 됩니다.
언마스크는 할리우드 여배우들 사이에서 특히 사랑받았습니다. 지우면 지울수록 피부가 좋아지는 제품이라는 입소문을 타면서, 마법의 오일(magic oil)이라고까지 불렸죠.
그런데 사실 슈에무라의 본고장인 일본에서는 언마스크가 환영받지 못했다고 해요. 기름진 오일로 누가 화장을 지우냐며, 예전처럼 크림으로 화장품을 지우는 일본 사람들이 대다수였다고 하죠. 슈에무라에서 이 문제를 정확히 어떻게 해결해 나갔는지는 불분명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부정적인 반응에 굴하지 않으면서도 제품을 계속해서 발전시켜 나갔다는 겁니다.
우에무라 슈는 “언젠가는 오일 클렌징이 반드시 클렌징의 대세가 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고 해요. 이와 동시에 제품을 꾸준히 업그레이드시켰죠. 1978년, 1979년, 1984년 등 1996년까지 무려 7번의 제품 리뉴얼이 있었습니다. 1996년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뷰티 오일의 형태로 발전했고요. 이후에도 슈에무라의 클렌징 오일은 끊임없이 개선을 거듭하여, 2002년에는 피부 타입별로 쓸 수 있는 맞춤 클렌징 오일이 나오게 됩니다.
혁신적인 시도가 시장에서 늘 빠르게 받아들여지는 건 아닙니다. 슈에무라의 클렌징 오일 역시 마찬가지였고요. 현재 15초에 한 병씩 팔리는 전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슈에무라의 클렌징 오일 뒤엔, 제품력에 대한 고집과 끊임없는 제품 개선이 있었습니다.
또한 슈에무라는 1968년 세계 최초로 메이크업 쇼를 선보였습니다. 당시 패션쇼는 있었어도 패션쇼 무대 뒤에서 이루어지는 메이크업이 주인공이 되는 메이크업 쇼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죠.
하지만 슈에무라에서는 메이크업 과정을 패션처럼 하나의 퍼포먼스로 만들며 메이크업 쇼를 하게 됩니다. 여기에 더불어 ‘메이크업 트렌드 룩’이라는 것도 최초로 만들게 되고요.
사실 이전에도 메이크업 트렌드 룩이라는 게 존재하긴 했지만, 이는 화장품 회사가 자신의 메이크업을 보다 잘 판매하기 위한 전략일 뿐이었지 진짜 트렌드를 제시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슈에무라에서는 이러한 통념에 반기를 들고, 패션처럼 시즌별로 트렌드 룩을 선보이기 시작했던 거죠.
그렇게 탄생한 게 바로 모드 메이크업(Mode Makeup)입니다. 실험적인 메이크업 트렌드를 모드 메이크업을 통해 선보였는데요. 특히 아이섀도와 속눈썹이 돋보였죠.
1968년 5월에는 카 레이싱 깃발을 모티브로 한 체크 문양의 아이섀도 체커드 플래그(Checkered Flag)를, 7월에는 당시 아이 메이크업에 잘 사용하지 않던 화이트 색상을 사용한 아이글래스 글래머(Eyeglass Glamour)를, 12월에는 공작의 날개를 형상화한 피콕(Peacock) 룩을 선보였습니다.
슈에무라의 혁신적 시도는 제품 단에서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매장 측면에서도 혁명적인 시도를 했죠.
1983년 슈에무라에서는 도쿄 오모테산도 한가운데 ‘슈에무라 코스메틱’이라는 부티크 숍을 열게 됩니다. 당시에는 화장품 브랜드가 백화점 내에서 여러 브랜드와 함께 판매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슈에무라 코스메틱은 마치 패션 부티크 숍처럼 도쿄 명품거리에 독립적인 숍으로 문을 연 거죠.
게다가 그 안에서 소비자들은 마음껏 제품을 테스트해볼 수 있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일본 여성들은 색조 화장품을 눈으로만 보고 구입해야 했다고 해요. 제품을 직접 발라보고 컬러가 어울리는지를 확인한 후에 제품을 구매하는 게 맞다고 여긴 우에무라 슈 덕에 소비자의 편의성이 크게 증대된 겁니다. 매장은 당연히 성공할 수밖에 없었죠.
3년 후인 1986년, 슈에무라는 도쿄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프랑스 파리에도 아시아 브랜드 최초로 부티크 숍을 열게 됩니다. 유명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의 마지막 제자인 장 루이 베르레에게 건축을 맡겨 외관만으로도 화제가 됐죠. 유럽 내 슈에무라의 인지도 역시 자연스럽게 높아졌습니다.
우에무라 슈의 이러한 수많은 혁신적 시도들은, 그의 탁월한 사업 감각이 뒷받침되었기에 지속적으로 이뤄질 수 있었던 걸로 보입니다.
2006년 우에무라 슈의 클라이언트 중 한 명은 팝스타 마돈나(Madonna)였습니다. 마돈나는 우에무라 슈의 아트디렉터인 지나 브룩(Gina Brooke)과 함께 일했는데요. 하루는 지나 브룩이 마돈나에게 농담을 합니다. 진짜 다이아몬드를 속눈썹에 붙이면 멋지지 않겠냐고 말이죠.
그런데 마돈나는 놀랍게도 너무 좋은 아이디어라며, 오늘 밤 콘서트에 당장 실행해보자고 제안한 겁니다. 그렇게 부랴부랴 세계에서 가장 비싼 속눈썹이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0.75캐럿짜리 다이아몬드가 붙은 속눈썹이 말이죠.
우에무라 슈는 이 짧은 순간에도 사업적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언론에서 다이아몬드 속눈썹에 대한 기사를 내기 전에, 당시 미국 최고의 럭셔리 백화점이었던 니만 마커스(Nieman Marcus)에 10,000불짜리 다이아몬드 인조 속눈썹을 빠르게 만들어 입고시켰던 거죠.
그가 더 대단한 건, 우에무라 슈는 이 정도로 값비싼 제품에 대한 수요는 한정적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재빨리 10,000불짜리 속눈썹의 보급형 버전인 25불짜리 인조 속눈썹도 함께 입고시켰습니다. 마돈나를 따라 하는 수많은 십 대 소녀들을 타겟팅해서요.
그의 전략은 성공적이었습니다. 25불짜리 인조 속눈썹은 슈에무라의 연매출을 천억 원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데 큰 공을 세웠거든요.
창업주와 브랜드의 현재
슈에무라는 2000년 로레알 그룹(L'Oreal Group)의 자회사가 되었습니다. 일본 화장품 기업으로서는 최초로 말이죠. 그리고 2004년에는 로레알 그룹이 지분을 52.9%로 늘리면서 최대주주로 거듭나게 됩니다. 현재 슈에무라는 아시아권에 탄탄하게 자리 잡았고, 북미권과 러시아 등 다양한 국가에 진출해 있죠.
우에무라 슈는 로레알 그룹의 인수 후에도 명예회장으로서 슈에무라에서 계속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했습니다. 수많은 혁신적인 시도들을 계속하면서요.
그는 2007년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끊임없이 일을 했습니다. 쉴 수도 있었지만 일하는 게 가장 즐거워서 끊임없이 일했다고 해요. 우에무라 슈는 그의 일이 예술가의 작품 활동과 닮았다고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예술가처럼 새로운 걸 계속해서 만들어 내기 때문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