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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 Jul 22. 2019

바이레도(Byredo) 브랜드 스토리

저의 바이레도와의 첫 만남은 러시아 공항에서였습니다. 공항 면세점 선반에 바이레도 향수가 한 줄 진열되어 있었는데, 제대로 된 매장이 아니었음에도 바이레도가 명품 향수라는 건 한눈에 알 수 있었어요.


향을 하나씩 맡아보니 겉으로 볼 때 이상으로 끌리는 무언가가 생기더군요. 번듯한 매장 없이 제품만 단순히 나열되어 있어도, 좋은 브랜드는 빛을 발한다는 걸 그때 제대로 느꼈죠. 이후 바이레도는 오랜 기간 제게 깊은 인상으로 남아있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 깔끔하고 우아한 바이레도라는 향수를 만든 창업주는 바로 농구선수를 꿈꾸던, 향수라곤 써본 적도 없던 청년이었습니다.




벤 고햄의 이야기


198cm의 껑충한 키에 문신이 가득한 몸. 바이레도의 창업주 벤 고햄은 심플하고 럭셔리한 브랜드 이미지와는 사뭇 대조적입니다.


벤 고햄 ©Philip Sinden


고햄의 인생은 쉽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변화를 견뎌내기 위해 애쓰는 삶이었고, 그런 그의 인생에서 평생의 버팀목이었던 농구로도 결국 결실을 맺지 못했죠.


고햄의 아버지는 캐나다, 스코틀랜드 혼혈의 과학자였고, 어머니는 인도 출신의 승무원이었습니다. 둘은 비행기에서 만나 6개월 만에 결혼했고, 1977년 벤 고햄이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태어났죠.


그런데 5살 때 고햄의 아버지가 식구들을 놔두고 이탈리아로 떠나버렸던 겁니다. 벤 고햄은 쉽게 화를 내기 시작했고, 학교 수업에도 집중하기 힘들어했죠. 그러다 고햄은 12살 때 어머니의 재혼으로 캐나다로 건너가서 살게 됐는데요. 인종 차별 문제 등으로 캐나다에서도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고햄이 행여 삐뚤어질까 어릴 때부터 다양한 운동을 시켰는데요. 그중에서도 고햄은 농구에 매력을 느꼈다고 합니다. 7살 때부터 매일 공을 드리블하며 등교할 정도였고, 적응이 어려웠던 캐나다에서도 농구가 그의 안식처였습니다.


그는 농구로 유명한 뉴욕의 고등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다녔고, 대학마저도 농구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습니다. 고햄은 대학교 명예의 전당에 오를 정도로 촉망받는 농구 선수였다고 해요.


벤 고햄 ©Sneakers N Stuff


꿈은 커져갔고, 고햄은 고향이었던 스웨덴의 프로 농구팀에 입단하고자 스웨덴으로 건너가게 됐습니다. 그런데 전속 계약의 전제 조건이었던 영주권을 따기가 너무 힘들었던 겁니다.


그는 낮에는 슈퍼마켓과 건설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을 벌고, 밤에는 스웨덴 농구 구단에서 무급으로 훈련하면서 영주권을 따려고 연일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무려 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설사 영주권을 받는다 해도 선수로 뛰기엔 나이가 너무 많아질 수 있는 상황이 됐죠.


고햄은 결국 오랜 꿈이었던 농구를 접기로 결심했습니다. 대신 다른 직업을 알아봤는데, 캐나다 출신 이민자였던 그를 받아주는 곳은 스웨덴에 없었던 겁니다. 고햄은 크게 좌절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간직해온 꿈도 사라졌고, 다른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질 수도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는 아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1년 과정의 스톡홀름 아트 스쿨에 진학해 순수 미술을 전공하게 된 거죠. 고햄은 회화, 조각, 미술사, 사진 등 시각적인 것들에 둘러싸여 시간을 보냈습니다. 다행히 순수 미술은 그의 취향이었고, 졸업하고도 아크릴 회화 쪽으로 나가려고 마음을 먹었죠.


아크릴 회화 도구 ©Amazon


그런데 그는 졸업하자마자 진로를 바꾸게 됐습니다. 그것도 시각적인 미술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도 않는 향수라는 분야로 말입니다.


그 시작은 저명한 조향사 피에르 울프(Pierre Wulff)와의 만남이었습니다. 고햄은 친구들과 함께 울프와 저녁식사를 했는데, 그로부터 향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향수에 완전히 매료되어 버렸습니다. 당시 향수에 문외한이었던 고햄은, 향기가 "흥미로운 방식으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라고 해요.


세계적인 프랑스 조향사 피에르 울프 ©Pontus Höök


그는 향기에 매료된 나머지 집에서 향초를 만들어보기 시작했죠. 흥미 수준으로 시작했던 일에 열정이 커지면서, 그는 피에르 울프를 좇아 뉴욕 사무실까지 날아갔습니다. 당시 그는 직장도 집도 없어 매일 밤 친구네 집 소파에서 자던 어려운 상황이었는데도 말이죠.


그리고 그는 울프에게 자신이 만든 향을 선보이며 향수에 대한 자신의 아이디어를 이야기했습니다. 음악은 우리로 하여금 그 노래를 듣던 시절로 되돌아가게끔 하는 힘이 있잖아요. 고햄에게는 향수도 마찬가지였던 겁니다. 고햄은 '과거의 순간으로 데려다주는 향수'를 만들고 싶다고 울프에게 말하며 도움을 청했습니다.


브랜드명도 그에 걸맞게, '향기'이자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무언가'를 뜻하는 'Redolence'라는 단어에 'By'를 붙인 'By Redolence'를 줄여 만든 바이레도(Byredo)라고 지었고요. 그렇게 2006년, 럭셔리 향수 브랜드 바이레도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고햄은 아버지에게서 풋강낭콩 향이 났다고 해요. 향수를 통해 아버지와 함께하던 시절로 돌아간 느낌을 받으면서 고햄은 향수의 세계에 흠뻑 빠지게 되죠. ©Cooking Channel




바이레도의 성공 비결


바이레도 성공의 가장 큰 동력 중 하나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던 고햄이 국제적인 명성을 자랑하던 울프의 도움을 이끌어낸 것이었습니다. 울프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바이레도가 명품 향수 브랜드로 단기간에 자리 잡는 건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울프는 고햄에게 자금을 대줬을뿐더러, 세계적인 조향사 제롬 에피넷(Jerome Epinette)과 올리비아 지아코베티(Olivia Giacobetti)를 소개해주기까지 했습니다. 덕분에 명품 브랜드를 지향하던 바이레도에 꼭 필요했던 자금과 전문성이 확보되었죠.


프랑스 조향사 제롬 에피넷. 록시땅, 빅토리아 시크릿, 아틀리에 코롱 등의 향수를 조향 했죠. ©The Fragrance Foundation
프랑스 조향사 올리비아 지아코베티. 무화과를 잘 쓰는 조향사로 유명해요. 딥티크, 겔랑, 프레데릭 말 등의 향수를 조향 했어요. ©위키피디아


사실 울프는 고햄이 스웨덴에서 가져온 향수가 조금 별로였다고 합니다. 심지어 고햄에게도 솔직하게 그 말을 전달했고요. 그런데 왜 울프는 고햄에게 도움을 준 것이었을까요?


어릴 때부터 농구를 해왔던 고햄에게는 운동선수 특유의 집요함이 보입니다. 고햄은 자신의 성공이 "내가 갖추어야 한다고 믿는 강박적이고, 쉬지 않으며, 발전하고 진화해가는 인격"에서 나왔다고 믿는다고 하죠.


고햄은 울프의 '별로'라는 평가에 실망하지 않고, 계속 다시 시도했습니다. 새로운 향 샘플을 새로 주문하고, 다시 조향 해보는 걸 반복했죠.


고햄의 이러한 태도와 열정에 울프는 고햄이 자신과 좀 더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해 주게 된 겁니다. 그리고 그게 조금씩 발전했고요. 10개월 뒤 고햄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한 바이레도의 첫 5개의 향 샘플이 세상에 나왔을 때, 울프는 그렇게 고햄의 옆에 있게 됐습니다.


이렇게 성공적인 시작을 한 바이레도는, 시간이 흘러도 영원한 명품(timeless classic)이 되기 위한 노력을 강박적으로 해나갔는데요. '영원한 명품'이 무엇인가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내리고, 그걸 집요하게 지켜갔던 점이 바로 바이레도를 성공으로 이끌지 않았나 싶습니다.


바이레도 제품들 ©Savoir Flair


먼저 명품은 시간이 지나도 그 가치가 영원하거나 더 커져야 합니다. 그렇기에 바이레도에서는 다른 회사들처럼 1~2년 정도를 기준으로 하는 게 아니라, 100년이 지나도 사랑받을 수 있는 향과 디자인의 향수를 만듭니다.


100년이라는 시간 동안 수많은 트렌드는 생겨났다 없어질 테죠. 그 긴 기간 동안 사랑받는 공통적인 요소는 얼마 없을 겁니다. 그래서인지 바이레도에서는 더하는 것보다 빼는 것에 많은 신경을 씁니다. '이 향이, 이 디자인이, 이 향수가 왜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물어가며, 분명한 답을 얻을 수 있을 때에만 다음 단계로 진행하는 거죠.


보통 향수 브랜드에서는 몇십 개 원료를 가지고 향수를 만들곤 하는데, 바이레도에서는 5개에서 10개까지로 원료 수를 제한합니다. 혼합 방식 역시 최대한 절제해서 원료 고유의 향을 살리는 방향으로 가고요. 패키지 역시 튀지 않으면서도 세련되고, 높은 퀄리티라는 게 한눈에 보일 수 있어야겠죠.


덕분에 바이레도의 향수는 향기부터 외관까지 군더더기 없이 명쾌하고 심플합니다.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덜어내는 것. 바이레도의 이러한 빼기의 미학은 시대를 관통할 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다양한 사람들을 매혹시킵니다.


바이레도의 신상품, 선데이즈드 향의 제품들 ©Byredo


또한 영원한 명품은 높은 퀄리티가 기본이겠죠. 바이레도에서는 품질에 대해 강박적인 수준의 집착을 보입니다.


먼저 바이레도의 향수에 들어가는 모든 성분과 원료는 바이레도만을 위해 특별히 개발되며 최상의 품질을 자랑합니다. 패키징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향수를 론칭했을 때 바이레도에서는 만족스러운 향수 보틀과 활자를 찾을 때까지 2년 간 세계 곳곳의 공장을 돌아다녔다고 하죠. 그러면서도 계속 아쉬운 부분이 보여 십 년이 넘도록 계속 다듬고 있고요.


바이레도의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패키징 ©Into the Gloss


바이레도는 향수 제조 과정에 있어서도 완벽주의 탓에 오랜 시간을 들입니다. 우선 고햄은 평소 수첩을 들고 다니며, 향과 연결될 수 있을만한 감정과 경험을 수시로 메모해 놓습니다. 그중에서 선택된 메모가 초기 버전의 향수로 만들어지기까지는 6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리죠. 그리고 그 이후에는 지루한 수정 작업에 들어갑니다. 적게는 30번에서 많게는 200번에 걸쳐 향을 다듬는데, 그러다 초기 아이디어와 멀어지면 바이레도에서는 과감히 그 향 제조를 중단해버리고 새로 시작하죠. 이러한 과정 탓에 바이레도에서는 향 하나가 세상에 나오는 데 평균적으로 일 년 반이라는 긴 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이러한 퀄리티에 대한 고집, 그리고 세월이 흘러도 불변하는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가 바이레도의 가치를 누구나 알아볼 수 있게끔 한 게 아닐까요. 실제로 바이레도의 타깃 고객군은 18세부터 85세까지의 모든 사람들이라고 하죠. 나이, 성별, 시대를 불문하고 바이레도의 향수는 사랑받을 수밖에 없다는 자신감의 발로가 아닌가 합니다.


바이레도 파리 매장 ©Byredo



창업주와 브랜드의 현재


고햄은 2006년 울프와 함께 바이레도의 첫 다섯 가지 향을 만들고 나서는, 창문 없는 지하 공간에 사무실을 하나 마련했습니다. 거기에 이케아(IKEA) 테이블을 놓고 다시 향초를 만들기 시작했죠. 당시 향수로 시작하기에는 최소 발주량이 커서 자금이 많이 들었거든요.


곧 그의 향초는 스웨덴 NK백화점과 인테리어 매장 스벤스크트 텐(Svenskt Tenn)에서 판매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판매처도 판매량도 서서히 늘어갔죠. 고햄은 현재 벤처캐피털리스트인 조한 베커(Johan Bäcke)를 CFO이자 COO로, 앤더스 얼스트랜드(Anders Ullstrand)를 CEO로 영입해 제대로 된 브랜드를 구축해나가기 시작했고요.


스벤스크트 텐 ©Svenskt Tenn


그 이후 바이레도는 빠르게 성장해 세계 곳곳에 매장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딥티크(Diptyque)와 맬린 앤 게츠(Malin+Goetz) 등을 소유하고 있는 만자니타 캐피털(Manzanita Capital)에 1년 간의 협상 끝에 2013년 인수되었죠. 인수 후 베커와 얼스트랜드는 회사를 떠났지만, 벤 고햄은 여전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바이레도는 2015년 바이레도 최초로 레더 컬렉션을 출시하면서, 하이엔드 향수 브랜드에서 럭셔리 브랜드로의 새로운 도약을 알렸습니다. "전혀 생소했던 분야에 뭔가를 더한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죠. 오직 가능성만 보는 그런 벅찬 감정을 느끼는 게 좋았다"라고 벤 고햄은 말하죠. 현재 바이레도는 가방과 향수뿐만 아니라, 핸드크림과 바디크림, 바디워시 등 스킨케어 라인으로도 좀 더 확장했어요.


바이레도의 레더 컬렉션 중 일부 ©Byredo
바이레도의 화장품 ©Byredo


한편 벤 고햄의 개인적인 삶을 들춰보면, 벤 고햄은 2009년 아빠가 되어 현재 아내, 두 딸, 그리고 강아지 두 마리와 살고 있죠. 그리고 그는 만자니타 캐피털 인수를 통해 돈을 번 뒤에 어머니의 빚을 모두 갚아 드렸습니다. 아버지와도 이제는 가끔 연락하고 지내고요. 고햄은 여행과 출장을 자주 다니며 영감을 얻는다고 해요.


벤 고햄과 딸의 모습 ©Of Emma


바이레도의 향수는 향이 단순하고 명쾌하기에 향이 모두 신선하고 매력적이에요. 라 튤립, 모하비 고스트 등 향수 마니아 사이에서도 이름난 향수가 많은데요. 그중에서도 블랑쉬(Blanche)와 엠/엠 잉크(M/Mink)를 시향 해보길 추천드려요.


블랑쉬는 보송보송한 빨래에 고급스러움이 더해진 향기로 가장 대중적인 향이고, 엠/엠 잉크는 우리나라와 일본의 먹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굉장히 실험적이고 개성적인 향이거든요. (엠/엠 잉크는 처음에는 살짝만 시향 해보세요!) 두 향수를 시향 해보고 나면, 바이레도의 세계가 얼마나 깊고 넓은지 단숨에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바이레도 블랑쉬(좌)와 엠엠잉크(우) ©Byredo




※ 이 글은 제가 티알앤디에프 외부필진으로서 기고한 글입니다. 무단 전재나 재배포는 금지됩니다. 즐겁게 읽어주셨으면 좋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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