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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 Jul 16. 2019

괴짜 할아버지가 만든 뷰티 브랜드, 버츠비

버츠비라는 브랜드는 왠지 친근감이 듭니다. 꿀벌이 생각나는 노란색의 제품도 귀엽고, 어딘가 괴짜 같아 보이는 할아버지가 제품에 그려져 있는 것도 재미있죠.


벌꿀 특유의 촉촉함과 향기로움이 묻어나는 제품들을 쓰다 보면 왠지 모르게 안심하게 됩니다. 내 몸에 절대 나쁠 것 같지 않거든요. 특히 버츠비의 레스큐 오인트먼트(Res-Q Ointment)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직접 만들어 준 연고 같은 느낌도 나고요.


버츠비 레스큐 오인트먼트 ©버츠비 페이스북


실제로 버츠비는 한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브랜드입니다. 그 할아버지가 바로 버츠비 창업주 중 한 명인 버트 샤비츠(Burt Shavitz)죠.



버트 샤비츠 스토리


버트 샤비츠(Burt Shavitz) ©Capitalism


버츠비는 버트 샤비츠가 만 49세일 때 시작된 브랜드입니다. 보통의 화장품 창업가 치고는 꽤 많은 나이였죠.


버트 샤비츠는 1935년 뉴욕 맨해튼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는 고등학교에서 댄스 파티나 농구, 야구 경기에 한 번도 간 적이 없을 정도로 비사교적이었다고 하죠. 대신 연기자였던 아버지와 조각가였던 어머니 덕분에 어릴 때부터 카메라와 가까이 지냈다고 해요.


그는 독일 주둔 미군부대에서 근무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사진작가의 길을 걷게 됩니다. 1950년대부터 20년 가까이 말이죠. 유명한 타임-라이프(Time-Life) 매거진에 그의 사진이 실리기도 했었고, 1961년 존 에프 케네디(John F. Kennedy)의 취임사 사진도 그가 찍었다고 해요.


젊은 시절의 버트 샤비츠 ©Flare
버트 샤비츠가 찍은 뉴욕의 풍경 ©뱅거 데일리 뉴스(Bangor Daily News)


1960년대 후반, 그는 도시 생활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도시의 아파트에서 사는 삶이 꼭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해요. 게다가 그때는 TV가 확산되기 시작한 시점이어서 인쇄 산업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기도 했고요.


결국 그는 그가 34살이었던 1969년부터 뉴욕에 있는 산장 호텔 모홍크 마운틴 하우스(Mohonk Mountain House)에서 관리인으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친구로부터 양봉업을 취미 삼아 배웠죠.


그가 일하던 모홍크 마운틴 하우스 ©모홍크 마운틴 하우스


자연에서의 삶에 매력을 느낀 그는 본격적인 귀농을 하기로 마음먹죠. 그가 관리인으로 일하던 모홍크(Mohonk) 보다 더 조용하고 저렴한 곳에서 말이에요.


거기서 그는 신의 계시인 것처럼 양봉업자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당시 그는 친구로부터 벌통 하나를 받은 상태였는데요, 하천에서 우연하게 벌떼들을 발견하게 된 겁니다. 벌집 하나만 있어도 꿀을 팔 수 있으니, 더 이상 직업을 찾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했죠. 그는 그렇게 양봉업자가 됩니다. 그의 벌집은 26개로 늘어났고, 1년에 3,000 달러를 벌게 됐습니다.


양봉업자로 일하는 버트 샤비츠의 모습 ©비즈니스 인사이더


각종 공과금과 세금을 내고, 먹고 살 음식을 살 수 있는 돈이었죠. 규모를 더 키울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럴 생각이 없었어요. 원하는 것만 해도 되는, 천천히 움직이는 삶을 원했기 때문이죠. 매해 7월 4일부터 가을 사냥철이 시작하기 전까지만 나가서 꿀을 팔았고, 그마저도 주말에만 나가서 판매를 했다고 해요.


그렇게 10여 년간 양봉업자로 살다 1984년, 그는 49살의 나이로 록산 큄비(Roxanne Quimby)를 만나게 됩니다. 당시 운전하던 자가용이 고장 난 록산 큄비가 히치하이킹을 했는데, 버트 샤비츠가 그녀를 발견하고 태워주게 된 겁니다.


록산 큄비(좌)와 버트 샤비츠(우) ©비즈니스 인사이더


당시 큄비는 34살로 샤비츠보다 15살이나 어렸고, 이혼한 상태로 쌍둥이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들은 그들의 사랑을 방해할 수 없었죠. 대화하면서 큄비는 샤비츠에게 빠지게 됐고, 샤비츠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녀가 웨이트리스로 일하던 식당에 가서 자주 식사하며 그녀에게 말을 걸게 되죠. 샤비츠와 더 친해지고 싶어졌던 큄비는 그에게 양봉업을 배울 겸 일도 돕겠다고 제안하면서 둘은 함께 일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샤비츠는 10여 년간의 양봉으로 90 킬로그램이 넘는 밀랍(beeswax)을 쓰지 않고 모아둔 상태였습니다. 샤비츠는 큄비에게 그 밀랍으로 양초를 만들어볼 것을 제안하죠. 그녀는 거기서 사업적 기회를 발견했습니다. 꿀을 식용으로 파는 것보다, 선물용 제품으로 팔면 같은 용량 대비 훨씬 더 비싼 가격에 판매할 수 있으니까요. 두 아이를 키우면서 겪어온 재정적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실마리가 보였던 거죠.


밀랍(비즈왁스) ©Farm and Fleet


그녀는 주방에서 핸드메이드로 밀랍 캔들을 만들어, 1984년 11월 말 샤비츠와 함께 한 중학교의 크리스마스 페어에서 캔들과 꿀을 함께 선보였습니다. 그리고 하루 만에 200달러의 매출을 올렸죠. 그게 바로 브랜드 버츠비(Burt's Bees)의 시작이었습니다.




버츠비의 성공 비결


중학교 크리스마스 페어에서 시작된 버츠비는 1년 만에 매출 2만 달러를 달성했습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87년에는 매출이 8만 달러를 넘었고, 1989년에는 무려 18만 달러로 매출이 성장하게 되죠. 10년 뒤인 1999년에는 14백만 달러가 되었고요. 결국 버츠비는 2007년 미국 클로락스(Clorox) 그룹에 1조 원 넘는 금액으로 인수되었습니다.


버츠비 성공의 계기는 무엇이었을까요?


가장 큰 건 브랜딩이었습니다. 크게 두 가지 축으로 버츠비는 브랜딩 되었는데요. 그중 하나는 바로 버트 샤비츠였습니다. 버트 샤비츠를 브랜드의 얼굴로 내세우면서, 히피스럽고 독특하면서 재미있는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한 거죠.


대만에서 아이돌급 인기를 자랑했던 버트 샤비츠 ©Fast Company


사실 버트 샤비츠는 사업을 키울 욕심이 별로 없었다고 해요. 아무도 오지 않고, 내가 아무 데도 가지 않아도 되는 날이 바로 좋은 날이다(A good day is when no one shows up, and you don't have to go anywhere.)라고 그가 말했던 것처럼, 그는 사업적 성공보다는 자연에서의 소박한 삶에 행복을 느꼈습니다.


손님이 와서 작은 사이즈의 캔들은 없냐고 하면, 버트 샤비츠는 "큰 거 반으로 자르면 돼요."라고 답할 정도로 무심한 면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기 때문에 매력적이었죠. 덥수룩한 수염에,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는 신경도 쓰지 않는, 괴짜 같은 모습의 할아버지.


버트 샤비츠의 목판화 일러스트레이션 ©버츠비


큄비는 샤비츠를 버츠비 브랜드의 얼굴로 만들었습니다. 샤비츠의 얼굴은 처음에는 프로모션용 자료와 디스플레이에 등장하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제품 패키징에도 나오게 됐죠. 브랜드 보이스(brand voice)도 샤비츠처럼 여유롭고 소박하게 통일했고요.


이런 버츠비의 모습은 세련되고 외모가 뛰어난 모델을 내세우는 여타 화장품 브랜드와는 정반대였기에, 사람들은 버츠비에 깊은 인상을 받게 됐습니다. 획일화된 미를 강조하는 화장품 시장에 반기를 드는 듯한 속 시원함도 있었달까요. 진짜 뷰티는 겉만 번지르르한 게 아니라 속이 알차야 한다고 주장하는 듯했죠.


게다가 브랜드명이 버트의 꿀벌들이라니요,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는 이름 아닌가요.


브랜드 모델을 비롯한 패키징, 브랜드 보이스, 브랜드명까지 모두 완벽하리만큼 잘 어우러졌습니다. 사람들은 버츠비라는 브랜드를 기억할 수밖에 없었죠.


버츠비 제품들 ©Tony Cenicola, 뉴욕 타임스


버츠비 브랜딩의 나머지 한 축은 바로 천연 브랜드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버츠비의 350여 개 되는 제품들 중 절반이 100% 천연이고 나머지 절반이 99% 천연인데요. 처음부터 그 원칙은 철저하게 지켜졌습니다.


할머니의 주방 찬장에서 볼 법한 가공이 안 된 천연 재료들로 제품을 만들었던 거죠. 페퍼민트, 아보카도, 코코넛, 아몬드처럼 천연일 뿐만 아니라 친근하고 발음하기도 쉬운 재료들로 말이에요.


지금은 이러한 천연 성분으로 제품을 만드는 게 흔하지만, 1990년대에는 그렇지 않았다고 해요. 읽어봐야 무슨 성분인지도 모르고 발음하기조차 쉽지 않은 화학 원료들로 대부분의 화장품이 만들어지던 시절이었다고 하죠. 버츠비의 제품은 누구나 알 만한 천연 원료를 씀으로써 소비자들에게 신뢰를 얻었습니다.


게다가 타이밍도 좋았어요. 버츠비가 첫 론칭할 당시 미국에서는 히피(hippie), 땅으로 돌아가자(back-to-the-land)는 운동 덕에 천연 제품을 파는 소규모 창업자가 많이 늘어나고 있었거든요. 이전까지는 작았던 천연 제품 시장이 미국에서 급속도로 커지고 있었던 거죠. 버츠비는 그 급성장하는 시장에 진입했던 겁니다.


Back-to-the-land Movement ©Fotolia/Emoraes


현실적인 운영 측면에 있어 버츠비가 성공을 향해 도약할 수 있었던 계기는 바로 유통업체에 도매 납품을 시작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기업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으니까요.


버츠비는 1984년 크리스마스 페어에서 200달러라는 성과를 낸 이후, 샤비츠와 큄비가 없는 돈 있는 돈 탈탈 털어서 마련한 400달러에서부터 시작된 브랜드였습니다. 처음에는 은행 대출을 받는 게 아예 불가능했거든요. 두 명 모두 대출을 받을만한 직업이나 신용이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요.


은행 대출 없이 브랜드를 운영한다는 건, 불필요한 것들을 최대한 없애가면서 브랜드를 운영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동시에 영세한 방식으로 제품 판매를 꽤 오랜 시간 지속할 수밖에 없다는 걸 뜻했죠.


그래서 버츠비는 초기 4년 동안은, 버츠비를 첫 판매했을 때처럼, 온갖 페어와 페스티벌에서 판매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창업주 큄비와 샤비츠가 직접 판매를 했죠. 이 방식은 손님을 직접 만나고 그들의 행동을 관찰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었으나, 이곳저곳에서 열리는 페어와 페스티벌 특성상 재구매가 이루어지기는 쉽지 않았을 겁니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버츠비는 회사 전화번호는 커녕 창업주 큄비와 샤비츠 집에도 전화가 없어서 고객들이 연락하기는 더 어려웠죠. 연락책 역할을 해주던 사람이 있긴 했지만 불편했을 거예요.


게다가 샤비츠와 큄비는 페어를 갈 때면 숙박비를 아낀다고 차에서 자기도 하고, 판매 부스에서 몰래 자다가 블랙리스트에도 오르는 등 빡빡한 예산 하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 몇 개월은 열정으로 버틴다 해도 3년이 넘는 기간은 버티기엔 꽤 긴 시간이었을 걸로 보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매 납품으로 시선을 돌린 건 현명한 선택이었죠. 1989년 매사추세츠(Massachusetts)에서 도매 쇼(wholesale show)가 열려서 버츠비가 참석했습니다. 이때 조나(Zona)라는 뉴욕의 럭셔리 부티크에서 버츠비의 테디베어 양초 몇십 개를 주문해가게 되었죠.


1989년 당시 버츠비의 테디베어 양초 ©버츠비


그런데 조나 샵 창가에 전시되어 있던 버츠비의 양초가 사람들 눈에 띈 겁니다. 버츠비의 테디베어 캔들은 히트상품이 되어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죠.


리테일러들은 앞다투어 버츠비의 양초를 주문하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몇십 개 규모가 아니라 몇 백개 규모였습니다. 뉴욕의 여러 부틱 매장들, 스미소니안 박물관 매장 등 뉴욕의 많은 곳들에서 버츠비의 캔들을 찾았죠.


조나(Zona) 부틱의 1994년 모습 ©Zona New York


몰려드는 주문량을 소화하기 위해 버츠비는 보다 사무실의 면모를 갖춘 곳으로 본사를 옮기게 되죠. 그전까지는 버려진 작은 학교의 건물을 본사로 쓰고 있었는데, 전기도 안 들어오고 수돗물도 안 나오는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도매 납품을 시작하면서 메인(Maine)의 작은 마을에 있는 볼링장으로 본사를 이전했는데, 거기는 기존 건물보다 컸을뿐더러 전기도 쓸 수 있고 수돗물도 나왔죠. 즉, 실제 사무실로 기능을 할 수 있는 곳에 본사를 마련하게 된 겁니다.


게다가 이 시기에 버츠비의 직원은 40명이 되었습니다. 직원들 대부분은 버츠비의 제품을 핸드메이드로 생산하기 위해 채용된 여성과 아이들이었죠. 덕분에 큄비와 샤비츠는 제품 생산 측면에서는 조금 더 여유가 생겼을 겁니다.


그렇게 첫 도매 주문이 들어왔던 1989년 버츠비의 매출은 18만 달러로 증가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 옮긴 본사에서 버츠비는 기틀을 잡으며 성장해 나갔습니다. 1991년에는 매출이 150만 달러까지 늘면서 버츠비가 공식적인 회사로 설립되었고, 현재까지도 버츠비의 베스트셀러인 립밤이 개발되기도 했죠.



1991년 당시 버츠비 립밤 ©버츠비


마지막으로 버츠비가 크게 성공한 계기는 인재의 중요성을 이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버츠비는 1989년 옮긴 본사에서 1993년까지 4년의 시간을 보냈는데요. 1993년에는 직원이 44명에 매출만 350만 달러가 됐습니다. 30억 원이 넘는 금액이었죠.


회사 규모가 커지자 버츠비에서는 전문적인 인재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됐습니다. 당시 메인(Maine)에 있던 본사는 너무 외진 곳에 있어 실력 있는 인재를 채용하기가 어려웠거든요. 회사에서 영화관 하나 가려해도 차로 한 시간이 걸렸으니, 아무리 구인광고를 해도 사람이 구해지질 않았던 겁니다. 당시 버츠비의 회계 업무를 했던 직원이 수학을 잘하던 14살 고등학생이었을 정도라고 해요.


거기에 더해 메인에서 사업을 하는 데에는 수많은 비용이 들었습니다. 세금도 많았고 교통비도 비쌌죠. 게다가 당시 버츠비는 핸드메이드로 모든 제품을 생산하고 있었는데, 체계가 전혀 안 잡히는 상황이었습니다.


버츠비에서 본사 이전을 검토하자 많은 미국 주에서 러브콜을 보냈습니다. 그중에 선택된 곳은 노스캐롤라이나(North Carolina)였죠. 버츠비는 1994년 초 1,670 제곱미터, 500평이 넘는 크기의 방직 공장과 그 부지로 본사를 이전했습니다.


버츠비 노스캐롤라이나 본사 ©yTravel Blog


노스캐롤라이나는 메인에 비해 여러 장점이 있었습니다. 우선 세금도 8분의 1 수준이었고, 교통도 좋은 데다 교통비도 저렴했죠. 또 레브론(Revlon), 폰즈(Pond's), 더 바디샵(The Body Shop) 같은 화장품 브랜드가 몰려 있었기에 인재를 구하기도 더 쉬웠죠.


하지만 모든 게 완벽할 수는 없는 법이죠. 노스캐롤라이나의 인건비는 메인에 비해 굉장히 높았습니다. 메인에서 버츠비는 인건비로 시간당 5달러를 지급했는데, 노스캐롤라이나에서는 10달러 밑으로는 아무도 일하지 않으려고 했던 겁니다. 매출의 절반이 핸드메이드 제품에서 나왔던 버츠비 입장에서는 큰 문제였습니다.


이때 버츠비는 과감하게 핸드메이드 제품을 모두 단종시켜버리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15억 원이 넘는 매출이 사라지게 되었죠.


하지만 대신 버츠비를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레블론(Revlon) 출신의 공장 매니저와, 랑콤, 보그, 빅토리아 시크릿에서 경험을 쌓은 마케팅 매니저 등 전문성이 있는 사람들이 버츠비에서 일하기 시작했죠.


대학에서 예술을 전공했던 록산 큄비는 예술적이고 창의적이지만 체계적이지 못했고, 그래서 자신에게 없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만 채용했다고 말합니다. 그 덕에 수많은 MBA 출신들이 버츠비에서 일하기 시작했다고 하죠.


덕분에 버츠비 브랜드는 성장을 거듭해, 1998년에는 매출이 820만 달러를 넘에 이르게 됐습니다.


1998년 출시되어 인기를 구가했던 버츠비 레몬 버터 큐티클 크림 ©버츠비




브랜드와 창업주의 현재


사실 노스캐롤라이나로 본사를 옮겼던 1994년, 버트 샤비츠와 록산 큄비는 결별했습니다. 그때부터 둘의 연인 관계뿐만 아니라 비즈니스 관계도 본격적으로 나빠지기 시작했죠.


워낙 제멋대로인 데다 사업에 열성적이지 않았던 샤비츠와, 완벽주의자에다 너무 완고했던 큄비는 그전부터 충돌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샤비츠가 직원과 바람을 핀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는 회사에서 나가게 됐죠.


둘의 비즈니스 관계는 1999년에 공식적으로 종료되었습니다. 큄비가 1999년 13만 달러 상당의 집과 땅을 주면서 3분의 1에 해당하던 샤비츠의 지분을 모두 사들였거든요. 사실 당시 매출에 비하면 굉장히 적은 금액이었죠. 그래서인지 둘의 사이는 샤비츠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좋지 않았고, 나중에는 소송까지 했습니다.


한편 브랜드 버츠비는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1994년 9월에는 첫 번째 버츠비 매장도 열었고요, 일본에도 진출했습니다. 1998년에는 매출이 850만 달러가 되더니, 2000년에는 3,000만 달러로 뛰었고, 2003년에는 4,350만 달러가 됐죠. 우리나라 돈으로는 대략 90억 원, 350억 원, 500억 원인 셈입니다.


런던 코벤트 가든 버츠비 팝업 스토어 ©Alopex
런던 코벤트 가든 버츠비 팝업 스토어 ©Alopex


2003년 버츠비의 지분 중 80퍼센트는 AEA홀딩스라는 투자 기업에 매각됐습니다. 1,600억 원이 넘는 금액에 말이죠. 이후 클로록스(Clorox)에서 버츠비를 1조 원 이상에 사들였고요.


버트 샤비츠는 버츠비 사업에서 은퇴한 이후에도 뜨거운 물과 전기 없이 산장에서 사는 생활을 계속했다고 합니다. 그의 반려견과 함께 말이죠. 그는 해가 뜨면 일어나고, 어두워지면 잠이 드는 자연인의 생활을 했다고 해요. 그러다 2015년, 그의 나이 80세에 호흡기 질환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록산 큄비는 2016년 8월 그녀가 사들인 메인(Maine) 주의 땅을 바탕으로 국립공원을 만들어 기부했죠. 무려 3억 5천 제곱미터, 1억 평이 넘는 면적의 공원을 말이에요. 큄비는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사업에 대한 온라인 강의를 여는 등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버츠비에서 추천하고 싶은 제품은 1991년 만들어진 립밤이에요. 당시 미국인들은 몇십 년째 챕스틱(ChapStick)과 블리스텍스(Blistex)에서 만들어진 립밤을 쓰고 있었는데, 그 제품들에는 미네랄 오일 같은 석유 기반의 원료가 들어가 있었죠.


버츠비에서는 1830년대 어떤 농부가 일기장에 남긴 레시피를 참고해 천연 립밤을 만들었습니다. 차별화 포인트가 확실했던 버츠비 립밤은 다른 립밤보다 가격이 비쌌는데도 출시하자마자 인기를 얻어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죠. 버츠비의 립밤은 지금까지도 버츠비의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현재 버츠비 립밤 중 일부. 향이 많이 다양해졌죠. ©버츠비 인스타그램


무려 30년 가까이의 전통을 자랑하는 그 립밤, 이번 주말에 매장에 들러 한 번 테스트해보며, 버츠비라는 브랜드를 한 번 체험해보시면 어떨까요.



※ 이 글은 제가 티알앤디에프 외부필진으로서 기고한 글입니다. 무단 전재나 재배포는 금지됩니다. 즐겁게 읽어주셨으면 좋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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