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냥함이라곤 없는 거칠고 무서운 자연과 만나다
#1.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로 오늘 제주 일지를 시작해보려 한다. 오늘은 딱 이 시 같은 날이었다.
바람 부는 날이면 / 황인숙
아아 남자들은 모르리
벌판을 뒤흔드는
저 바람 속에 뛰어들면
가슴 위까지 치솟아오르네
스커트 자락의 상쾌!
#2.
제주 집에는 동쪽과 서쪽 두 갈래로 길이 나 있다. 서쪽보다는 동쪽이 좀 더 번화하다. 작은 시내 느낌이랄까? 음식점도 카페도 더 많고 세탁소도 있다.
서쪽은 그에 반해 딜레탕트라는 이름의 카페 한 개 정도? 상점 없이 길만 죽 이어져 있어서 혼자 다니기엔 왠지 꺼려졌다. 사람 인기척이 너무 없으니 괜히 으스스한 느낌이 들었달까. 서쪽 길의 시작점인 딜레탕트 카페까지가 겁 많은 내가 혼자 갈 수 있는 한계선이었다.
혼자 계속 제주에 머물렀다면 아마 숙소 서쪽은 전혀 방문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친구 L덕에 미지의 세계였던 숙소 서쪽을 오늘 탐방할 수 있었다.
#3.
숙소 서쪽은 좀 더 날 것의 분위기였다. 바람, 돌, 여자가 많아서 제주를 삼다도라고 한다지. 이 중 바람을 원 없이 체험할 수 있었다. 서쪽에서 바다를 향해 가면 갈수록 바람이 거세져서 나중에는 머리카락이 얼굴을 때릴 정도가 됐다. 숙소에서는 분명히 반팔 반바지를 입으니 딱 좋은 산뜻한 봄날씨였는데 점점 으슬으슬해졌다.
걷고 또 걸어서 배 몇 척이 정박해있는 바닷가에 다다랐는데 무서워서 바다 바로 앞까지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폭풍 같은 바닷바람이 날 집어삼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바다에 가까이 가면 휘몰아치는 바람 탓에 바다에 빠져버릴 것만 같았다. 거센 바람이었고 공격적인 바다였다. 아름답기보다는 무서웠다. 어제 방문했던 함덕해변이나 세화해변과는 너무 다른 날 것의 자연.
자연 앞에서 한낱 인간이란. 작고 작은 말 그대로 미물. 저마다 아등바등하며 살지만 거대한 자연 속에서 지구와 우주 속에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한없이 하찮고 무력하다는 걸 온몸의 감각으로 확인한 듯한 느낌이었다. 정제되지 않은 쌩 자연은 인간을 압도하는 공포스러운 존재였다.
#4.
우리가 우연히 방문했던 피플카페는 이곳의 바다와 참 잘 어울리는 공간이었다. 낡고 투박한 인테리어에 직접 구운 케이크나 쿠키가 아니라 쿨하게 에이스과자를 내어주는 곳. 화장실 근처에 있는 테이블에선 살짝 퀴퀴한 냄새마저 나는 듯했다. 하지만 이 거친 느낌이 여기 바다와는 참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우리는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야외 테라스에 앉았다. 바다는 여전히 높고 거친 파도를 만들어내고 있었고 바람은 따뜻한 봄날 트렌치코트를 입고 핫초코를 마셔도 추위에 떨 만큼 거세게 불었다.
나란 존재가 인간이란 존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느낌, 저 바다에 한번 빠지면 곧바로 파도에 밀려가 사라져 버릴 작고 약한 존재라는 걸 온몸으로 사정없이 깨닫게 해주는 이 바다와 이 카페가 좋았다. 사람 눈에 보기 좋게 재단되고 정제된 상냥한 자연만 보다가 이런 거친 자연을 만나니 좀 더 진짜 같았달까.
제주에 와서 못 하는 게 많아지면서 느꼈던 그 해방감을 여기서 또 한 번 느꼈다. 사람이란 존재가 미약하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나를 좀 더 가볍게 해 준다. 힘을 빼게 해 준다.
#5.
이곳의 꽃과 풀도 거친 바다와 닮았다. 더없이 건강하다. 햇빛과 바람이 풍부해서일까, 난 이만큼 건강한 식물을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본 적이 없다. 다육이가 잔디처럼 난다. 꽃은 거의 발광하는 것만 같은 원색이다.
생기 있는 걸 넘어서 에너지가 넘치는 느낌의 꽃과 풀은 여기서 처음 보는 것 같다. 사람 손을 전혀 타지 않은 채 자기 마음대로 건강하게 자란 식물들.
#6.
제멋대로 부는 바람과 예쁘기보다는 무서운 바다, 건강미 흘러넘치는 꽃과 풀. 거친 자연 속에서 한낱 먼지 같은 존재인 나. 비록 몸은 덜덜 떨었지만 마음만은 가뿐하고 상쾌한 날이다.
※ 제가 직접 찍은 사진과 영상입니다. 무단 도용및 복제를 금지합니다 :)
※ 이 글은 면세전문지 티알앤디에프(TR&DF)에 동시에 연재됩니다.
[제주 체험기] DAY 6 : 제주의 거친 자연과 마주하다 (trndf.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