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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리학관 Nov 08. 2021

[은비의 마음책방] '나'로 사는 걸 방해하는 관계끊기

고맙지만 불편한 사람 / 백온유의 '유원' 

그 사람이 고맙지만, 불편해요


참 고마운 사람이지만

어쩐지 마음이 무겁고 불편한 사람.

이런 관계가 있으신가요?


상담실에서 대인관계 고충을 이야기하다보면

한 사람에 대한 복잡한 마음을 갖는 경우가 있어요.


이런 사례들처럼 말이예요. 


엄마의 기대가 부담스러운 A

"저는 엄마에게 자랑스러운 딸이예요."

  고생해서 제 뒷바라지도 다 해주셨죠. 

  그런 엄마가 고맙지만, 엄마의 기대가 갑갑해요.

  회사에 들어올 때도 기뻐하셨는데

  이제 관둔다고 하면 엄마가 실망할까 두려워요."


팀장님의 믿음을 꺽기 힘든 B

"팀장님은 항상 저를 믿어주셨어요."

  덕분에 열심히 일해서 인정도 많았죠.

  그런데 이제는 저도 좀 쉬고 싶어요.

  하지만 못한다고 말씀드리기가 망설여지네요."


친구가 버거운 C

"고마운 게 많은 친구예요.

 제가 힘들 때 위로해주고 얘기도 들어주구요.

 그런데 요즘은 친구가 힘든데, 전화 오는게 겁나요.

 끊임없는 불평, 짜증과 화를 받아주기 힘들어요.

 이런 제가 이기적인 걸까요?" 


살아남은 아이, 유원


오늘 소개해드릴 백온유의 소설 '유원'의

주인공 유원이도 이런 복잡한 마음에 놓여있는데요.




고등학생인 유원이는 

일명 '이불 아기' 란 과거가 있습니다

살던 아파트에 큰 화재가 났을 때

중학생이던 언니가 6살 된 유원을

이불에 감싸 밖으로 던진 덕에 살아남았거든요. 

화재 속에서 유일한 생존자였죠. 


그 일 이후 사람들은 수시로 말합니다.

"그래도 잘 컸네."

"언니 몫까지 행복해. 두 배로 열심히 살아."


유원은 스스로를 이렇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나는 엄마의 하나 남은 딸이자

언니가 선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품

이미 끝난 언니의 삶을 연장시키며 보조하는 존재.'


그리고, 이불에 감싼 채 던져진 유원을

받아내고 그 과정에서 다리까지 다친 '아저씨'. 

생명의 은인이자 은혜를 입은 대상이지만

유원은 이 아저씨가 끔찍히도 싫습니다. 


매년 언니의 기일에 찾아와

투자, 사업 등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유원 부모님께 돈을 빌려달라 요구하는데


차마 거절도 못하고 쩔쩔매는 부모님 보는 것도 싫고

의사 되서 아저씨 다리 고쳐주기로 하지 않았냐며

공부 열심히 하라고 건내는 농담도 싫구요.


소설 '유원'은 이렇게

언니와 아저씨의 희생으로 살아남았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는 주변의 축복

언니의 몫까지 더 잘 살아야한다는 부담감

성가시지만 미워해서는 안 될 것만 같은 아저씨

등에 둘러싸여 조심성이 많은 아이로 자란 유원이

그런 기대와 굴레, 죄책감에서 벗어나

점차 '나'로 살아 갈 용기를 내는 이야기입니다. 


기대에 부응하는 삶 vs 나로 사는 삶


유원처럼 인상적인 사건을 겪지 않더라도

우리는 주변의 시선이나 기대 속에서 살아가지요.


특히, 부모의 기대처럼 나를 사랑한다고 믿는 사람의 

기대는 참 무시하기가 쉽지 않고 무거워요.

위의 사례처럼 자랑스러운 딸이 부담되기도 하지만

이왕이면 부모님을 기쁘게 해주고 싶고

기대에 부응해서 인정받고 싶기도 하니까요. 

그게 또한 자식의 부모에 대한 사랑이겠죠.


혹은 기대에 부응하지 않으면 죄책감이 느껴져서

상대를 실망시키는 게 두렵고 힘들어서

어떻게든 애를 쓰며 기대에 맞게 살기도 합니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라는 말은 때때로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있지요.


직장 상사나 친구, 연인 사이에서도 

상대가 나에게 무얼 원하는지가 보일 때

그 기대가 때로 나를 버겁게 할지라도

함께 하는 게 좋아서, 마음의 빚이 있어서

거절하거나 거절당하는 게 힘들어서,

기꺼이 나를 상대가 원하는 틀에 맞추고

질질 끌려다니면서 관계를 유지하기도 하는데요. 




하지만 그렇게 기대에 속박되어

오랜 기간을 상대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다보면

불쑥불쑥 화가 나고 지치는 때가 옵니다.


사람에게는 인정의 욕구 말고도

자율성과 독립성의 욕구도 있으니까요.

상대에 대한 애정이나 고마운 마음이 깊어도

끊임없이 내가 정해놓은 바운더리를 침해하면

내 경계를 지키고자 하는 욕구가 강해집니다.

'나'로 살고 싶다는 강한 외침이자

'나'를 보호할 수 있는 건강한 화가 나는거지요.


하지만 이 화에 대해서 2차 감정도 듭니다.

내가 이렇게 화를 내도 되는건가, 하는 검열이

또 다시 나를 불편하게 하면서

화를 누르기도 하고 되려 죄책감을 갖게도 돼요.


이렇게 두 마음이 싸울 때, 어떻게 해야할까요?


No 라고 말 할 용기


유원은 누구에게도 말 할 수 없는 비밀이 있습니다.

나를 살린 우리 언니가 싫다는 것.

나를 구해 준 아저씨를 증오한다는 것.


차마 그 숭고한 희생들에

마땅히 고마움을 느껴야 하는 대상에게

이런 마음을 품는 게 죄스럽지만

아주 솔직한 유원의 마음이기도 해요.


이렇듯 아무리 커다란 사랑도

그 사랑이 나의 생각과 행동을 제약하고

나 자신으로 사는 걸 방해한다면

불편해지고 피하고 싶게 마련입니다.


그런 관계는 끊어 낼 필요가 있어요. 



유원 역시 '나'로 살기 위한 용기를 냅니다.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한 건 수현이란 친구지요.


'죄책감의 문제는 미안함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합병증처럼 번진다는 데에 있다.

자괴감, 자책감, 우울감.


나를 방어하기 위한 무의식은 나 자신에 대한 분노를

금세 타인에 대한 분노로 옮겨 가게 했다.

그런 내가 너무 무거워서 휘청거릴 때마다

수현은 나를 부축해 주었다. '


수현은 사실 아저씨의 딸입니다.

하지만 유원은 그걸 모른체로 친해졌어요.


수현은 유원이 이불 아기란 걸 알고 있지만

다른 아이들처럼 쉬쉬하며 겉으로 친절하거나

어른들처럼 더 잘살아야한다, 식의 

축복이나 위로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유원 자체로 느껴주는 수현이 좋았을테지요.


또한, 무책임하고 뻔뻔한 가장인 아빠에게

죄책감을 갖지 않고 당당히 미워하고

그 관계에 미련을 갖지 않는 수현을 통해

그래도 아저씨에게 고마워 해야 한다는

유원의 죄책감은 그 무게가 가벼워집니다.


'나'를 상대의 희망과 기대 속에 가두는 관계 대신

'나'로 자유롭게 살게 하는 치유를 경험한거지요.


기존에 내가 관계 맺었던 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틀을 가진 건강하고 좋은 관계는

언제나 그렇듯 사람을 성장시킵니다.  


그래서 마침내 유원은 아저씨에게 말합니다.


"그 때, 제가 너무 무거웠죠.

제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다리가 으스러진 거잖아요.

죄송해요. 제가 무거워서. 불행하게 해서.


 그런데 아저씨가 지금 저한테 그래요.

 아저씨가 너무 무거워서 감당하기가 힘들어요."


여러분도 가끔 이렇게 말하고 싶어지지 않나요?


엄마가 날 위하는 걸 알지만

이제는 저를 그만 조종했으면 좋겠어요.

엄마의 사랑의 너무 버거워요, 라고.


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네가 기대하는 모습으로만 있을 수는 없어.

있는 그대로 나로 너에게 사랑받고 싶어, 라고. 


누군가가 무겁다면, 

조금은 내 감정과 욕구에 솔직해져보세요.

그걸 표현하는 걸 두려워하지 마세요.


그럼, 유원처럼 진정한 자유가 찾아옵니다. 


관계의 갈등이나 파국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관계가 시작되기도 합니다. 




높은 곳을 날아오르는 용기


소설의 끝에 유원은 

패러글라이딩을 타고 맘껏 날아봅니다.


'높은 곳에 서려면 언제나 용기가 필요했다.

 ...... 그러나 이 곳에 서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나는 이런 걸 무서워하지 않는구나.

나는 오히려 이런 걸 좋아하는구나.

이곳에서 느끼는 감정은 설렘과 기대감,

혹은 전율이라고 불러야 마땅했다. '


베란다 밖으로 던져져 목숨을 구한 아이

그래서 마땅히 사고에 대한 후유증으로

높은 곳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것이란 고정관념은

어쩌면 사고 이후 '너는 ~ 살아야만해'

'너는 ~한 아이여야만해' 라는 여러 기대의

상징적인 면일 수도 있겠지요.


유원 또한 스스로 자신을 그런 시선 속에

가둬두고 살았던 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오히려 패러글라이딩을 즐기는 유원은

나는 다른 누군가가 규정한 나가 아닌

내 스스로 발견하고 찾아가는 나로 살겠다는

단단한 의지의 표현 같아서 이뻐보였어요.

그리고 유원의 삶을 응원하게 됩니다.


저는 성장소설을 참 좋아합니다.


이 소설도 '아몬드', '페인트' 등

지속적으로 청소년 성장소설을 발굴하는

출판사 '창비' 의 청소년문학상 수상작인데요


청소년의 성장을 그린 소설이지만

어른인 제가 더 큰 공감과 위로를 받은 것 같네요.


성장은 어린이나 청소년만의 전유물이 아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평생 이뤄가는 것이니까요.


여러분도 '나'로 사는게 만만치 않겠지만

가능한 내가 가보고 싶은 만큼 멀리, 높게

삶을 통해 걸어가보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발목을 잡고 있는 온갖 거추장스러운

기대, 기준, 요구, 규칙 등이 있다면

때로는 과감히 잘라내 버리고

가볍게, 가볍게 날아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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