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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리학관 Oct 14. 2024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 한강 작가님

희랍어 시간 / 심리학관

그녀가 침묵하며

꿈의 세부에 집중하려 애쓰는 동안,

심리치료사는 처방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갔다.


당신은 삶을 이해하기에 너무 어렸고,

당연하게도 자립적으로 살아갈 힘이

그때에는 전혀 없었으며,

위태했던 출생의 과정을 들을 때마다

자신의 존재가 사라져버릴 것 같은

위협감을 느꼈던 것이라고.


그러나 이제 당신은 훌륭히 자랐으며

힘을 가지게 되었다고.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위축되지 않아도 된다고.

목소리를 크게 해도 괜찮다고.

충분히 공간은 점유하고

어깨를 곧게 펴라고.

(p203)


****


(p205-207)

순조롭게 상담이 진행되고 있었던 오개월째,

그녀의 목소리가 커지는 대신

말을 잃은 것에

심리치료사는 충격을 받은 듯했다.


이해합니다, 라고 그는 말했다.

당신이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이해합니다.

소송에 패했다는 사실을,

때마침 찾아온 육친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겠지요.

견딜 수 없을 만큼 아이가 그리웠겠지요.

이해합니다.

그 모든 것을 혼자서 버텨낸다는 게

불가능하게 느껴졌겠지요.


과장되게 간곡한 그의 어조

그녀는 당황했다.


가장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그녀를 이해한다는 그의 말이었다.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

그녀는 담담하게 알았다.


모든 것을 묵묵히 수습하는 침묵이

두 사람을 둘러싼 채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요.


그녀는 펜을 집어,

탁자에 놓인 백지에

반듯한 글씨로 적었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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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희랍어 시간>

* 저자 : 한강 작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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