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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우울증>을 고백합니다

나종호 선생님 / 심리학관

by 심리학관

“나의 우울증을 고백합니다.” 10년 전 미국으로 건너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건강 관련 기사를 전문으로 쓰는 신문 기자의 에세이가 뉴욕타임스에 실렸다.


어린 시절부터 우울증을 앓으며 항우울제를 복용했지만 사회적 낙인 때문에 감췄다는 필자가,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자신의 우울증을 고백한 글이었다.


그의 고백에는 슬픈 계기가 있었다. 얼마 전 절친한 친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누가 봐도 건강해 보였던 헬스 트레이너였던 친구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어려움을 털어놓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친구가 세상을 떠나기 사흘 전 만났다는 기자는, 그때 자신이 “나 사실 우울증 때문에 힘들어”라고 말했다면, 친구 역시 마음속 고민을 말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는 자책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친구를 위하는 마음으로, 세상에 우울증을 고백하기로 결심했다.


처음 글을 접했을 때의 충격을 아직도 기억한다. 당시에는 미국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신문에 기자가 본인의 우울증을 털어놓는 것이 어딘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 뒤 10년 동안 미국 사회는 크게 바뀌었다. 수많은 연예인과 유명인들이 마치 릴레이처럼 자신들의 정신적 어려움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올림픽 수영 23관왕 마이클 펠프스를 비롯해, 프로레슬러이자 배우인 ‘더 락’ 드웨인 존슨, ‘캡틴 아메리카’ 크리스 에번스, 배우 설리나 고메즈와 짐 캐리, 레이디 가가 등이 우울증등 정신건강 문제를 밝힌 바 있다.

이는 미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영국의 해리 왕자, 가수 빌리 아일리시, 오스트레일리아의 수영 선수 이언 소프 등도 자신의 정신건강 문제를 고백했다.


아마 지금의 미국 사회 분위기라면, 이름 없는 기자의 우울증 고백이 뉴욕타임스에 실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너무 흔한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정신건강을 대하는 미국 사회의 태도는 그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조차 변화를 감지할 정도로 지난 10년 사이 크게 달라졌다.


정신질환에 대한 사회적 낙인이 크게 줄어들었고, 사람들은 정신건강 진단이나 치료를 더 이상 숨기지 않게 되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계기로 미국에서는 정신과 진료에 원격 의료가 적극적으로 도입됐다. 워낙 국토가 넓은 미국에서는 과거 정신과 진료를 받기 위해 직장인들이 반차를 내야 할 정도였다. 클리닉까지 장거리 운전을 하고, 대기실에서 기다려 30분 진료를 마치고 돌아오면 반나절이 훌쩍 지나가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일과 중 잠시 쉬는 시간에, 차 안이나 직원 휴게실에서 30분간 원격 진료를 받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원격 진료가 처음 도입됐을 때, 정신의학계는 이것이 진료의 진입 장벽을 낮출 것이라 기대했다. 정신과 진료실에 직접 찾아오는 것을 꺼리는 환자들이 낙인 없이 치료를 받을 수 있으리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요즘 내가 진료실에서 느끼는 바로는, 미국 사회는 이미 그 단계를 지나온 것 같다. 어떤 환자들은 직원 휴게실에서 원격 진료를 받다가 동료가 불쑥 들어오면, “나 지금 정신과 의사랑 상담 중이니까 잠깐만”이라고 자연스럽게 말한다.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미국에서 심리 상담이나 정신과 진료는 이제 퍼스널 트레이닝(PT)처럼 자기 관리의 일환으로 여겨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변화는 연애 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신체 건강을 위해 근육을 키우듯, 마음 건강을 위해 상담을 받는 것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이를 보여주듯, ‘힌지’(Hinge)라는 미국의 한 유명 소개팅 앱이 2022년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90% 이상이 심리 상담을 받는 사람을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선호한다고 답했다. 또한 89%는 첫 데이트에서 심리 상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경우, 두번째 데이트를 하고 싶은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또 다른 소개팅 앱인 ‘하일리’(Hily)가 2500명의 제트세대를 대상으로 시행한 올해 설문조사에서는, 그 세대 여성의 절반 이상이 “심리 상담을 받지 않는 남성과는 데이트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이로 인해 소개팅 앱의 자기소개 창에 ‘심리 상담을 받는 중’이라고 허위로 표시하는 남성이 늘었다는 재밌는 기사들도 소개되곤 한다.


이처럼 스스럼없이 정신과 진료, 심리 상담을 받는 문화 때문일까. 미국에선 특별한 ‘정신과 의사 셀럽’을 떠올리기 어렵다. 정신건강이 좋지 않으면, 몸이 아플 때처럼 병원에 가면 된다. 굳이 유튜브 정보를 찾아보거나, 자가진단을 하거나 대리위로를 받을 필요가 없다.


실제 미국은 우울증 환자의 60%가 치료를 받고, 중증 환자 4명 중 3명이 병원에 간다. 반면 한국은 중증 환자조차 10명 중 1명만 치료를 받는다.


지난 10년간 한국 사회도 변화해 왔다. 김구라씨를 비롯한 여러 연예인들이 공황장애를 고백했고, 정형돈씨는 불안장애를 고백했다. 내 책 ‘만일 내가 그때 내 말을 들어줬더라면’에서 내 경험을 털어놓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우울증을 공개한 유명인은 여전히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정신질환에 대한 낙인에도 단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공황장애를 비롯한 불안장애는 비교적 낙인이 덜한 질환이고, 우울증은 낙인이 더 심하며, 조현병은 그중에서도 가장 낙인이 강하다. 미국에서도 조현병을 고백한 유명인은 드물지만, 서던캘리포니아대(USC) 로스쿨 석좌교수 엘린 색스는 테드(TED) 강연을 통해 자신의 조현병을 고백했고, 이 영상은 100만회 넘는 조회 수를 기록하며 조현병에 대한 인식 개선에 기여했다.


한국에서 우울증을 고백하는 사람이 적고, 중증 우울증 환자의 치료율이 낮은 현실은 결코 별개의 문제가 아니다. 또한 이는 개인의 잘못이나 용기 부족 탓도 아니다.


사회적 낙인으로 인해 고백이 약점으로 간주되고 취업이나 보험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는 사회, “쟤 우울증이 있대”라고 수군거리는 사회에서는 정신적 어려움을 털어놓기 어렵다.


그럼에도 변화의 조짐은 분명하다. 최근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공개된 자리에서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혹은 자신의 정신적 어려움을 스스럼없이 이야기하는 이들을 만난다. 특히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낙인이 옅어지는 게 체감된다.


지난 70년간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변화한 사회이며, 앞으로도 어떤 나라보다 빠르게 변화할 사회이다. 미국이 지난 10년간 이뤄낸 정신건강 인식의 진전을, 한국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더 빠르고 더 깊이 있게 이뤄낼 수 있으리라 기대해본다.



<우울증을 너도나도 고백하는 사회>

* 나종호 선생님(미국 정신과 전문의이자 중독 정신과 전문의. 아픔을 고백하면 약점 잡기보다는 함께 공감해주고, 그 아픔을 보듬어줄 수 있는 사회를 꿈꾼다. 저서로는 ‘뉴욕 정신과 의사의 사람 도서관’, ‘만일 내가 그때 내 말을 들어줬더라면’이 있다.

* 한겨레 hanidigitalnews@hani.co.kr

* 2025.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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