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 심리학관
이번에 난리가 난 연세대학교는 하필 그 과목이 인공지능에 관련된 거였다. 게다가 조금만 검색해도 답을 찾을 수 있는 객관식 유형의 시험이었고, 더 나아가 정보통신 기술을 활용한 비대면 방식으로 치러졌다.
인공지능은 명시지(explicit knowledge), 즉 객관화되고 수량화된 지식을 대량 학습하여 확률적으로 가장 가능성 높은 결과를 토해내는 기술이다. 이른바 '객관식'처럼 선택지가 있는 시험에 유용한 도구가 될 수밖에 없다. 그것도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 아닌가.
이런 조건은 지식을 테스트하기 위함인지, 인내심과 윤리의식을 검증하기 위함인지 헷갈릴 정도다. 600명이 넘는 수강생이 있다 보니 어쩔 수 없었을 테고, 온갖 부정행위 방지 장치를 해놓았다고는 하지만, 차라리 '기술과 윤리' 과목 시험인게 나을 뻔했다.
굳이 객관식 시험으로, 굳이 온라인 비대면 상황에서 시험을 치를 필요가 있었을까? 이미 인공지능을 이용해서 시험을 치는 학생들이 계속 있어왔기에, 들키지만 않는다면 작은(?) 부정행위가 큰(?) 이득의 차이를 불러일으키는 상황을 조장해야 했을까?
당연히 부정행위를 해서는 안된다는 윤리의식이 기본적으로 장착되는 게 맞다.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학칙으로 법률로 일일이 규제하지 않아도 대학생이라면 갖춰야 할 기본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우리 대학이 정말로 그걸 당연한 것으로서 권장하는 문화를 키워왔나?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니었나? 학생들에게 온갖 피할 구멍을 열어놓는 뻔한 성공 사례를 제시해놓고서는, 문제로 터져 나온 것들만 강하게 제재하는 방식이 교육의 철학과 방법론으로 온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험을 치르게 하는 건 어쩔 수 없다 해도, 최소한 쉽게 '시험에 들지는 않도록' 해주는 것도 교육이다. 이들에 대한 평가 역시 말을 시켜보면 된다. 아니면 그동안 가르친 것들을 잘 활용하는 과제를 제출하게 해도 좋다. 인공지능을 써서 제출하면 또 어떤가. 애초에 인공지능을 잘 이해하고 활용하라고 만든 과목이라면 말이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연세대학교의 그 교수가 그런 식으로 시험을 치르고 평가를 할 수밖에 없었는지 안다. 학생은 많고, 인력은 부족하고, 평가자 개개인에게 주어진 시간은 더더욱 부족하기 때문이다. 당장 600명이 넘는 강의를 하는데 어떻게 구두 평가를 할 수 있을 것이며, 복합적인 평가가 가능한 과제를 고안하여 그 결과물을 채점할 수 있겠나.
지금 대학은 어떻게든 개설 강좌 수를 줄여서 이른바 '인건비'를 효율화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인기 있는 강좌는 대형을 넘어 초대형을 향하고, 학교 입장에서 보면 효자 상품이 된다. 학점을 따려면 뭐든 들어야 한다. 그러니 학생들은 매 학기 초에 수강신청 전쟁을 치른다. 이건 비유법이 아니다. 현실이다.
전쟁을 치러 겨우 입성한 강좌에서 낮은 점수를 받는다는 건 더 허탈한 종류의 사망을 의미한다. 윤리가 생존을 보장해주지 않는다고, 우리 대학은 이미 가르치고 있는 셈이다. 윤리적인 개체들은 이미 도태(혹은 심지어 도축)된지 오래다. 전쟁을 치르며 일단 생존해 있는 이들에게 윤리란 그저 '운이 나빠서 된통 걸려버린 것'의 다른 이름이다. 이미 우리 사회가 그렇게 가르쳐왔다.
<인공지능 윤리 없는 인공지능>
지금 우리에게 가장 부족해진 자원은 희토류도 아니고, GPU도 아니고, 바로 '윤리'다. 인공지능이 무너지도 모르고, 세상이 어떻게 바뀌는지도 모르고, 효율화의 압박을 거부하는 것이 단순한 낭만을 넘어 가히 '사망에 이르는 길'인 줄도 모르면서 하는 말이라고 비웃을 수도 있다.
윤리는 선과 악을 가르는 보편적 기준으로서의 도덕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그런 도덕이 개별 현실 속에 들어가서 실천성을 획득하도록 만드는 것이 윤리다. 달리 말하자면 모든 사회적 행위 영역 속에는 그것에 질서를 부여하는 윤리라는 게 형성되어야 한다.
이미 인공지능에 의한 혁명이 진행중이라면, 가장 시급한 일은 인공지능에게 어떤 윤리를 학습시킬 것인가를 정하는 데 있다. 그렇지 못하면 인공지능이 바꿀 우리 모든 삶의 영역이 전대미문의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가뜩이나 사회 곳곳이 제각각의 윤리를 지탱하거나 재구성하지 못해 무너져 내리고 있는데, 윤리 없는 인공 지능, 아니 아예 비윤리적인 인공지능에 의존한 사회가 온다면 어쩔 것인가?
그런 면에서 모든 과거의 혁명이 그랬듯, 지금의 혁명에서도 기회보다 위기가 먼저 찾아오고 있다. 그것이 위기가 아니라 기회라고 보는 사람들은 새로운 사회의 창조를 선도함으로써 새로운 부와 명예를 얻을 기회를 보는 게 게아니라, 기존 사회의 파괴를 조장함으로써 그 그무질서 속에서 타인의 재산을 탈취할 기회를 엿보는 것에 불과하다.
지금 신나게 학생들의 비윤리만 탓하는 사람들이, 내가 보기엔, 도리어 더 순진하기에 게으르고, 게으르기에 비정하고, 비정할 뿐만 아니라 비현실적인 도덕 담론 속에 머물러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그 학생들에게, 온갖 인공지능들에게 윤리를 학습시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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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커닝'을 욕하는 순진한 사람들에게.
학생들이 인공지능을 써서 시험이나 과제를 수행하는 건 진작 일반화됐다. 이미 인공지능에 의한 혁명이 진행 중이라면, 가장 시급한 일은 인공지능에게 어떤 윤리를 학습시킬 것인가에 있다.
* 정준희 원장님(미디어인문학교 해시칼리지)
* 시사IN / 2025.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