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 심리학관
신경다양성 운동은 정상적인 인지활동과 다른 특성을 보이는 신경다양인에게 장애라는 낙인을 붙이고 그런 판단에 따라 누군가의 삶이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결정하려는 시도를 거부한다.
무엇보다 이 운동은 장애를 개인의 문제로 병리화하고, 정상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장애인의 본질적 결함으로 보는 병리적 패러다임을 거부한다.
신경다양성을 비정상적이고 반사회적으로 억압해온 병리적 패러다임은 두 가지 기본 전제로 요약된다. 인간의 뇌와 정신이 구성되고 기능해야 할 ‘올바르고’ ‘정상적이며’ ‘건강한’ 방식 또는 뇌와 정신의 기능이 속해야 하는 상대적으로 협소한 ‘정상’ 범위가 존재한다. 신경 구성과 기능이 (그리고 그로 인해 나타나는 사고방식과 행동 양상이) ‘정상’이라는 주된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는 사람은 문제가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런 담론에 맞서 신경다양성 운동은 장애의 사회적 모델을 옹호한다. 이 관점은 장애를 사회적 문제, 즉 사회가 모든 개인을 포용하는 데 실패하여 발생한 문제로 본다. “자주 언급되는 예로 휠체어가 건물에 들어가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의학적 관점에서는 휠체어 사용자가 문제의 원인이므로, 재활치료를 받는 등 다시 이동성을 회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반면 사회적 모델에서는 건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경사로를 설치하거나 시설을 변경해 접근성을 보장해야 한다.”
신경다양인을 장애로 만드는 것은 정상성 기준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배제하고 고립시키는 사회적 환경이다. 이로 인해 신경다양인은 사회 활동으로부터 배척되고 존재를 부정당한다.
<내일의 나를 살리는 일>
요하나 헤드바의 〈우리가 언제 죽을지, 어떻게 들려줄까〉(마티, 2025)는 그 이데올로기를 비장애 중심주의(ableism)라고 말한다. ‘심신 건전자의 신체장애인 차별’이라고 풀이되기도 하는 에이블리즘은 사회적으로 구축된 정상성·생산성·바람직함·지능·탁월함·적합성에 대한 관념들에 기반해 사람들의 몸과 정신에 가치를 부여하는 체계를 가리킨다. 이렇게 구축된 관념들은 우생학·흑인혐오·여성혐오·식민주의·제국주의·자본주의와 결합하거나 투사되기도 하는데, 당신이 비장애 중심주의를 경험하기 위해 꼭 장애인일 필요는 없다.
종교, 이데올로기, 성별, 성정체성, 문화적·민족적 표식은 언제나 바뀔 수 있지만 평생 안 바뀌는 경우도 많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주요 정체성을 일관되게 유지한다.
그와 반대로 내가 의식하거나 의도하지 않은 사이에 쉽게 바뀌는 것임에도 영원히 바뀌지 않고
일평생 유지될 것이라고 오해하는 정체성이 있다.
하지만 인간의 몸과 정신은 수시로 장애와 비장애 사이를 오가며, 언젠가는 반드시 장애에 도달한다. “장애는 어떤 정치적 정체성과도 다르다.
모든 이가 언젠가 퀴어가 되거나 비백인이 되거나
여성이 되거나 식민지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장애인은 될 것이다.”
비장애 중심주의자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날 때부터 다르게 태어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장애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 수많은 방식이 있다. 최신 의학, 건강식품, 피트니스 클럽, 요가, 스포츠 산업은 “우리가 아플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까맣게 잊게 하지만, 삶은 생로병사(生老病死) 가운데 어느 것도 생략하지 않는다.
김예지 의원을 조롱한 박민영(국민의힘 대변인)과 감동란(유튜버) 또한 장애인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비장애 중심주의의 역설은 장애를 부정하는 것이
자신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것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장애인과 함께 사는 오늘은
내일의 나를 살리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