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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비의 마음책방]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수는 없을까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

by 심리학관

해야 할 일 vs 하고 싶은 일


어릴 때부터 어른들이 하시는 말 중에

제가 엄청, 무지 싫어했던 말이 있어요


바로,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는 없어."


저는 이 말만 들으면 반발심이 생기더라구요


"아니, 세상에 하고 싶은 게 얼마나 많은데

그거 다 하기에도 인생은 짧은데!!

하기 싫은 걸 왜 굳이 해야 하냐고!!!!!"


여러분들은 어떠신가요?

어른들 말씀에 끄덕끄덕- 일리가 있다 싶으신가요?

아니면, 저처럼 왠지 갑갑한 심정이 되시는지요?


그래서 한 번 생각해보려 합니다

하기 싫지만 해야 할 일을 순순히 받아들일 때

비로소 어른이 될 자격을 얻는 것인지

정말로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사는 건 불가능한지

혹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인지 말이예요


남아있는 나날


남아있는나날들.jpg


오늘 살펴 볼 소설은 '남아있는 나날' 입니다


이 글의 작가는 2017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일본계 영국작가, 가즈오 이시구로 인데요

복제인간의 삶을 통해서 인간의 존엄성을 성찰한

소설 '나를 보내지마'로 더 유명한 작가이기도 해요


'남아있는 나날'의 주인공 스티븐스는

영국의 달링턴 저택에서 34년간 일해온 집사로

해야 할 일을 위해 사는 책임감의 아이콘입니다

투철한 직업의식을 갖고 일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 등은 참는게 익숙하지요


그가 입버릇처럼 자주 하는 말에는

"나는 지금 너무 바쁘오"

"더 중요한 일이 있소" 등이 있는데요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는 없어

세상에는 하기 싫어도 해야 하고

중요한 일들이 많이 있어"

라고 다그치는 어른들과 많이 닮았지요?


스티븐스라고 왜 하고 싶은 게 없었겠냐마는

그에게 우선순위는 늘 자신의 일입니다

심지어 집사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하나뿐인 아버지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고


좋아하는 켄턴 양에 대한 연애감정도

집사의 책무 앞에 버려야 했으며

평생을 딜링턴 저택을 벗어나본 적도 없었어요


여러분 주변에도 이런 사람이 있으신가요?

혹은 본인 스스로가 그럴 수도 있을텐데요


할 일이 너~~무 많다, 는 말을 입에 달고사는 사람

책임감이 유난히 강하고 자기관리에 엄격해서

일과 과업 중심적이고 절제된 삶을 사는 사람

이를 위해 자신의 감정, 욕구, 관계는

희생시키는데 익숙한, 희생시켜야 한다고 믿는 사람


노오력의 배신


집사_Alexas_Fotos.jpg



어찌보면 소설 초반의 스티븐스는

자신이 해야한다고 믿는 일을 묵묵히 행하는

성실하게 삶을 사는 사람의 품위를 보여주는데요


이 이야기에는 반전이 있습니다

그가 평생 모셔온 주인인 달링턴 경이

사실은 나치 지지자임을 알게 된 것이지요

자신이 열성을 다해 품격있게 준비한

저택의 연회들은 나치 지지자의 모임이었구요


소설 제목처럼 인생의 남아있는 나날이

얼마남지 않은 시점에, 자신의 지난 삶을

통째로 뒤흔드는 진실을 알아버렸을 때

스티븐스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그는 그렇게 달링턴 저택에 헌신했음에도

어느 집의 집사로 일했는지 묻는 사람들에게

떳떳하게 밝히지 못하고 얼버무리고

나치에 기여했다는 사실에 허망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집사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며

농담을 좋아하는 저택의 새로운 주인을 위해

유머 연습을 하리라 결심하며 소설은 끝나는데요


이런 스티븐스를 보며 어리석다 할 수도 있고

직업의식만은 존경할만하다 할 수도 있겠지요


저는 스티븐스가 어쩐지 짠하고 불쌍했어요

한번쯤은 그저 맹목적으로 해야 할 일을 하지 말고

자신이 해야 한다고 믿는 일들에 대해서

왜? 라고 비판적으로 의심해봤으면 좋았을텐데...


should 보다는 want


여러분들은 스티븐스를 보며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상담실에 오시는 분들 중에도

스티븐스처럼 '해야 할 일' 이 많은 분들이 있어요


"제가 딸이니까/아들이니까 당연히 해야죠"

"제가 책임자인데 어떻게 안 해요"

"이 것도 제 일이고, 그 것도 제 일인데 어쩌겠어요"


내가 맡은 역할, 지위에 충실하지만

그것만 붙들고 살다 보니

삶이 늘 고달프고 여유가 없어 지치고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제대로 못 해낼까봐

불안한 마음을 토로하는 경우가 많으시지요

나만 왜 이렇게 살아야하나 억울하기도 하구요


"~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쓰는 분들도 계세요

삶에서 지켜야 할 규칙과 도리가 항상 많고

그걸 자신에게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강요하는데요


"사람이 자기 밥값은 하면서 살아야 해요"

"그 정도 도리는 지켜야지, 양심이 없네"

"일은 할거면 똑바로 제대로 해야지"


문제는 이렇게 책임과 당위성을 따르지만

그 것들이 어디서 온 것인지에 대해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을 때


스티븐스처럼 열심히는 살았는데

무엇을 위해 그렇게 사는지 모르는

좌표 잃은 삶을 살아가게 될 수 있다는 점인데요


수갑-lechenie-narkomanii.jpg



그러니 나에게 해야 할 일/해야 한다라는

'should' 와 'must' 가 많다면

그런 삶의 규칙들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고, 비판적으로 따져보세요


많은 경우, 이는 자신이 자라온 과정에서

부모로부터 물려받았거나

사회적인 경험들을 통해 형성되었을텐데요


무조건적으로 그래야만 하는 게 아니라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정도로

해야 한다가 아니라 하면 좋지만 안 할 수도 있다

라고 스스로에게 선택권을 주는 것만으로도

삶은 훨씬 더 유연해질 수 있습니다


또한, 가능하면 "해야해" 보다는

"하고 싶어(want)"를 더 자주 말하고

실행할 수 있도록 삶의 태도를 바꿔보세요


물론 살다보면 하기 싫지만 필요한 일도 있고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들도 있겠지요

삶에는 그런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음을 알고

이들을 잘 분별해내고 조율해나가는게

보다 성숙한 어른이 되는 과정이기도 할거예요


하지만 그럼에도 할 일을 하느라

자신의 감정이나 욕구에 계속 무심히 굴면

자기 내면의 목소리는 점점 더 작아져서

언젠가는 들리지 조차 않을 수 있어요

스티븐스에게도 단 한 사람이라도 그에게

의무와 책임만 갖고 살지 않아도 된다고

너는 무얼 좋아하냐고, 뭘 하고 싶냐고

진심으로 관심을 갖고 물어봐주었다면

조금은 다르게 살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여러분들도 내 안의 목소리가

아직은 나에게 열심히 말을 걸고 있을 때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뭘 원하는지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줄 수 있기를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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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우리에게 스티븐스 보다는

더 많은 남아있는 나날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 삶의 저녁이 되었을 때

지나온 날들에 더 만족하고

또 남은 날들을 반갑게 맞이할 수 있기를


그럴 수 있기 위해서 매 순간을 더 깨어있고

스스로에게 보다 친절하고 충실하며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의 균형을

잘 맞춰가며 살아갈 수 있기를 기대하며

오늘의 글은 마무리 할까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삶에서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 수도 없겠지만

그렇다고 하기 싫은 일만 하며 살 수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조금 뻔뻔하더라도 펀펀(funfun) 하게 살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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