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근히 중독되는 매력적인 이끌림
이제 더 이상 수정하고 싶어도 수정할 수 없는 강을 건너고야 말았다. 더 이상 수정을 해야 한다는 것은 내 욕심이자 집착이며, 마감기일을 넘겨 전체적인 일정까지 지연시키는 민폐 중의 민폐가 될 것이다. 하지만 아쉬움이 남는 이유는 무엇일까?? 초고를 쓸 때도 최선을 다 했지만, 초고라 쓰레기라는 것을 알고 난 후 더 최선을 다해 퇴고를 했다. 퇴고에 모든 신경을 썼기 때문에 일상 속 나의 루틴은 후순위로 밀려났고, 잠자리에 드는 시간도 늦어졌다.
하루의 리듬이 깨지더라도 끝까지 퇴고를 붙잡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창작의 고통보다 더 아픈 퇴고의 고뇌는 마치 출산을 하는 산모의 고통과 같아 보인다. 출산을 직접 하지 않은 나이기에 섣부르게 비교할 수도 있겠지만, 출간을 앞두고 마지막 퇴고는 아이를 만나기 전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약 40주 동안 새 생명을 기다리는 부모의 마음처럼, 나의 책 쓰기를 고대하며 퇴고를 하는 동안에도 어떤 모습으로 나올지 상상해 본다.
나 혼자 쓰는 것이 아닌, 공저이기에 마감 기일에 더 신경 쓰이는지라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읽고 퇴고하고픈 심정이다. 하지만 내 마음과는 다르게 퇴고의 과정은 순조롭지 않고, 꽉 막힌 출퇴근 길 도로 위 정체처럼 진전이 없다. 다시 읽고 또다시 읽어도 제자리걸음뿐이 퇴고의 시간, 힘들고 어려워도 반드시 해야만 하는 글쓰기의 화룡점정인 시간이다. 마치 어두운 긴 터널 끝에 밝은 빛이 보이는 것처럼 외롭고 글쓰기의 매운맛을 선사한 퇴고의 시간도 끝을 보인다.
이제 더 이상 퇴고를 할 수도 없고 아쉬움이 남지만 아쉽다고 해서 무엇도 바꿀 수 없다. 아쉬움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지금보다 성장하는 것이다. 글쓰기는 오직 글쓰기를 통해서만 배울 수 있고, 작가는 작가로 인해 탄생하기에 나는 글쓰기를 멈출 수 없다. 진정한 의미의 퇴고를 통해 ‘모든 초고는 쓰레기이다.’라는 헤밍웨이의 말을 경험함으로 일단 투척하는 글쓰기를 하며 퇴고의 시간을 가질 것이다. 퇴고로 새롭게 탄생하는 글쓰기의 또 다른 매력을 느끼며 나는 한 단계 성장함을 느낀다. 글쓰기는 나에게 성장의 기쁨은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