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를 수 없는 이름
옥철은 구덩이를 바라봤다.
그리고 처음으로 확신했다.
이건 사건이 아니다.
사건처럼 보이도록 배열된 순서일 뿐이다.
구덩이는 여전히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아래가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빛이 닿지 않는 것이 아니라, 빛이 거절당하는 공간처럼 보였다.
“형사.”
의종의 목소리는 가까웠다.
그는 어느새 구덩이 맞은편이 아니라, 같은 쪽에 서 있었다.
“자네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지.”
“공간입니다.”
옥철이 답했다.
“틀렸다.”
의종이 고개를 저었다.
“자네가 보고 있는 건 선택이다.”
안개가 천천히 흘렀다.
구덩이 위를 스치며 지나가던 안개는 한 번도 안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경계가 있는 것처럼.
옥철은 손목시계를 다시 들여다봤다.
초침은 여전히 멈춰 있었다.
그는 시계를 귀에 가까이 가져갔다.
소리가 없었다.
“시간이 멈춘 게 아닙니다.”
옥철이 말했다.
“시간은 가고 있습니다.
다만—저를 기다리지 않을 뿐입니다.”
의종은 미묘하게 웃었다.
“이제야 자네가 내 말을 이해하는군.”
“왕이 밀려나고, 기록이 정리되고, 이름이 사라진다.”
옥철이 낮게 읊조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람이 남는다.”
“그래.”
의종이 말했다.
“남는다는 건, 지워지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바람이 한 번 불었다.
구덩이 아래에서가 아니라, 등 뒤에서.
옥철은 처음으로 자신이 뒤를 돌아볼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성문은 보이지 않았다.
돌계단도 희미했다.
들어올 때는 분명 존재했던 길이
이제는 형태를 잃고 있었다.
“이곳은 출구가 아닙니다.”
옥철이 말했다.
“그렇지.”
의종은 담담했다.
“이곳은 방향이다.”
“방향?”
“아래로 가는 방향.”
의종은 한 발 다가왔다.
“자네는 조직 안에서 이미 한 번 떨어졌다.”
옥철의 표정이 굳었다.
“회의실에서, 자네가 보고서를 끝까지 읽던 그날.”
옥철의 기억이 번쩍였다.
회의실.
웃음.
폐왕이라는 단어.
“그날 자네는 위로 올라갈 길을 잃었다.”
의종이 말했다.
“그러니 이제 남은 건 아래뿐이지.”
옥철은 구덩이를 다시 내려다봤다.
이상하게도ㅜ두려움은 없었다.
대신 익숙함이 있었다.
“왕도 그렇게 생각했습니까.”
“아니.”
의종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두려웠다.”
잠시 침묵.
“그래서 웃었다.”
옥철은 그 말을 이해했다.
웃음은 용기가 아니라 결심의 표정이었다.
“오늘은 내가 죽는 날이다.”
의종이 다시 말했다.
“공식적으로는.”
“비공식적으로는.”
옥철이 말을 이었다.
“이동.”
의종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시선이 옥철을 지나 구덩이 아래로 향했다.
그 순간, 옥철은 또렷하게 느꼈다.
자신의 이름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감각.
‘철.’
쇠.
버티는 것.
녹슬어도 남는 것.
“자네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의종이 말했다.
“무엇을 위해.”
“자네가 나라는 걸 스스로 인정하는 것.”
안개가 갑자기 걷혔다.
짧은 순간, 구덩이 아래에서 빛이 번쩍였다.
불빛.
횃불.
피 묻은 바닥.
그리고—
칼을 든 그림자.
옥철의 숨이 멎었다.
그 장면은 기억이 아니었다.
경험이었다.
“진주.”
옥철의 입에서 단어가 흘러나왔다.
의종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제 시작이군.”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구덩이 가장자리가 조금씩 무너졌다.
작은 돌이 떨어졌다.
이번에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깊은 곳에서,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
옥철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는 아직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알았다.
다음 장면에서는 누군가 반드시 떨어진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