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의 안쪽에서 왕은 웃고 있었다
성 안쪽으로 이어지는 길은 생각보다 길었다.
옥철은 안내를 받지 않았다.
누군가 앞장서지도 않았다.
마치 이 길이 처음부터
그를 위해 비워져 있었던 것처럼.
돌계단은 닳아 있었다.
사람보다 시간이 더 많이 밟고 지나간 흔적이었다.
“여기서부터는…”
병사가 말을 멈췄다.
굳이 끝맺지 않아도 충분했다.
옥철은 혼자 걸었다.
안개가 짙어질수록 소리는 사라졌다.
발소리조차 성벽에 닿기 전에 흡수됐다.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도착하지 못한 채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가 멈춰 선 곳은
성 안쪽의 작은 공터였다.
허물어진 담장,
임시로 덧댄 처마,
그리고 그 안에 서 있는 한 사람.
의종이었다.
왕복은 단정했지만 화려하지 않았다.
빛바랜 붉은색.
자수는 닳아 있었고,
문양은 일부러 감춘 것처럼 절제돼 있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크게 웃는 것도,
소리 내 웃는 것도 아니었다.
마치 웃음이 한 번 지나간 뒤
그 자리에 남은 표정 같았다.
옥철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경남지방경찰청 강력계
옥철 형사입니다.”
의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먼바다 쪽을 바라보며
얕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말없이 웃었다.
이곳에서는
말보다 침묵이 더 정확했다.
“내가 웃고 있는 게 이상한가.”
“상황에 어울리진 않습니다.”
옥철이 말했다.
의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정도, 변명도 없었다.
“그래서 웃는다.”
“이유를 묻겠습니다.”
“이유는 늘 뒤에 남지.”
의종은 성벽 아래를 바라봤다.
“먼저 오는 건 결과고.”
옥철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아래로 향했다.
그곳에 구덩이가 있었다.
처음부터 보였던 것은 아니었다.
의식한 순간, 마치 땅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 것처럼 검은 입을 벌리고 있었다.
빛이 닿지 않았다.
아니, 닿았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저건 뭡니까.”
의종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버려지는 곳이다.”
“시체를 버리는 곳입니까.”
“아니.”
의종은 고개를 저었다.
“기록을.”
옥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손목시계를 봤다.
초침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밖에서 사람이 하나 죽었습니다.”
“기록관입니다.”
의종의 웃음이 사라졌다.
그건 감정의 변화라기보다 역할을 벗는 동작에 가까웠다.
“그 아이가 먼저 갔군.”
“알고 계셨습니까.”
“알고 있었다기보단.”
의종은 잠시 말을 멈췄다.
“순서를 알고 있었지.”
“무슨 순서 말입니까.”
의종은 천천히 옥철을 바라봤다.
그 시선은 왕의 것도, 심문당하는 자의 것도 아니었다.
마치
이미 같은 자리에 서 본 사람의 시선 같았다.
“왕이 밀려나고,
기록이 정리되고,
이름이 사라지고—”
그는 구덩이를 가리켰다.
“마지막으로 사람이 남는다.”
옥철은 그 말을 곱씹었다.
“그럼 그 기록관은—”
“필요 없어진 거지.”
의종의 말에는 잔인함이 없었다.
오히려 체념에 가까웠다.
그 순간,
옥철은 조직 안에서 자신을 부르던 그 별명을 떠올렸다.
폐왕.
“사람들은 자네를 뭐라고 부르나.”
“왜 그걸 묻습니까.”
“이상하게 닮았거든.”
옥철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폐왕이라고 부릅니다.”
의종은 웃었다. 이번에는 분명한 웃음이었다.
“역할이 같으면,
이름도 따라오는 법이지.”
안개가 한층 짙어졌다.
구덩이에서 바람이 올라왔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바람.
“오늘은 내가 죽는 날이다.”
의종이 말했다.
“공식적으로는.”
옥철은 고개를 들었다.
“그럼 비공식적으로는?”
의종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다시 시작하는 날이지.”
옥철은 구덩이를 바라봤다.
그리고 처음으로 확신했다.
이 사건은 살인이 아니다.
이건 이동이었다.
사람이 아니라, 정체성이.
그 순간,
둔덕기성의 바람이 다시 한 번 방향을 바꿨다.
마치 오래된 성이 다음 장면을 준비하고 있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