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에서 말의 무게를 지키는 법
지금 다니는 회사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복지 혜택과는 다른 장점이 하나 있다. 쉽게 사기를 당하지 않게 된다는 점이다. 업무의 성격상 상대의 말을 그대로 믿고 움직였다가는 낭패를 보기 쉽다. 그 난감함은 겪어본 사람만 안다. 설명으로는 다 담기지 않는다.
연차가 낮았을 때는 나 역시 여러 번 당했다. 협의했다고 믿었던 내용이 없던 일이 되거나, 분명히 들은 말이 부정되는 순간들을 겪었다. 그 이후로 나는 습관을 바꿨다. 메모를 남겼고, 통화를 기록했다. 지금은 자동 녹음과 텍스트 요약 기능 덕분에 업무 정리가 훨씬 수월해졌다.
기술은 감정을 줄여준다. 기록은 해석을 최소화한다. 나는 말과 행동이 다른 태도를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가능한 한 지킬 수 있는 말만 한다. 지키기 어려운 약속은 애초에 하지 않는다. 그 탓에 차갑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업무와 감정은 구분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특히 계약 관계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관계를 유지하는 힘은 신뢰이고, 그 신뢰를 지탱하는 장치는 계약이다. 국가 간에도 힘의 균형이 필요하듯, 조직 안에서도 역할과 책임이 명확해야 불필요한 소모가 줄어든다.
문서로 남긴 약속은 감정보다 오래간다.
최근 상품 입고 업무를 처리하다가 회송 건이 발생했다. 수량이 많지 않아 내가 처리하겠다고 했다. 대신 매입전표 수정과 과매입 동의 절차를 안내해야 했다. 작은 번거로움이었지만 문제없이 마무리될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말이 돌아왔다.
내가 직접 상품을 회수해 전달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기록을 확인하고 상황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묘한 불편함이 생겼다. 통화 녹취와 사내 메신저 자료에는 그런 내용이 없었다.
상대는 자신의 표현이 부정확했음을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묻는 방식이 부담스러웠다고 말했다.
그 순간 감정이 흔들렸다. 선의로 개입한 일이, 마치 내 과실처럼 흐려지는 느낌이었다. 사과 한마디면 정리될 문제였다. 그런데 책임의 초점이 미묘하게 이동하는 장면을 보며 생각했다. 문제보다 더 큰 문제는 태도일지도 모른다고.
결국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의 사과로 마무리되었지만, 나는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숫자 하나도 틀리면 안 되는 업무에서 연차와 나이는 설득력이 없다. 정확성과 책임이 전부다. 사람은 누구나 착각할 수 있다. 말이 엇갈릴 수도 있다.
문제는 실수가 아니라, 실수를 인지한 이후의 태도다. 잘못을 인정하는 일은 체면을 내려놓는 일이다. 하지만 그 용기가 관계를 지킨다.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 모여 일하는 곳이 조직이라면, 실수를 인정하는 태도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어떠한 형태로 기록을 남긴다.
특히 말이 자주 바뀌는 사람과 일할 때는 더욱 그렇다. 이것이 신뢰의 부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조직 안에서 서로를 보호하는 방식일 뿐이다. 회사는 다양한 사람이 모여 있는 공간이다. 모두를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다른 사람의 책임을 흐리는 사람이 되지 않을 수는 있다.
업무적 관계에서 자신의 말을 지키는 신의는 가장 기본적인 예의다.
그리고 나는 그 예의를 지키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