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에게 보내는 말
봄은 느리게 산을 넘고 있었다.
진주의 산자락은 아직 찬 기운을 품고 있었지만,
폐암자 주변의 흙에서는 이미 풀 냄새가 올라왔다.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은 바람이 스칠 때마다 낮게 울었다.
딸랑—
의종은 그 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다.
목의 상처는 많이 아물었다.
칼이 스친 자리는 검붉은 선처럼 남아 있었고,
말을 오래 하면 아직도 안쪽이 뜨겁게 아팠다.
그러나 더 이상 피는 흐르지 않았다.
그는 살아 있었다.
죽은 것으로 기록된 채로.
암자 안에는 약초 끓는 냄새가 옅게 퍼져 있었다.
구휼은 방 한쪽에서 조용히 약탕기를 살피고 있었다.
묻지 않는 사람의 손놀림은 늘 정확했다.
“오늘은 덜 아프십니까.”
구휼이 물었다.
의종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몸은 그렇습니다.”
구휼은 고개를 끄덕였다.
“몸 말고 다른 것도 아프지요.”
의종은 웃지 않았다.
부정도 하지 않았다.
밖에서는 바람이 한 번 숲을 훑고 지나갔다.
“내가 죽은 것으로 되었겠지.”
의종이 낮게 말했다.
구휼은 약탕기 뚜껑을 닫으며 답했다.
“그렇게 되어야 세상이 조용합니다.”
“죽은 왕은 편하겠군.”
“죽은 왕은 찾지 않습니다.”
그 말은 담담했지만 정확했다.
의종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암자 문틈 사이로 보이는 숲을 바라보았다.
산 아래 어딘가에는 진주가 있었고,
진주에는 자신이 죽었다는 문장이 퍼지고 있을 것이었다.
왕은 죽었다.
그 문장이 사람들을 안심시킬 것이다.
살아 있는 왕은 불안이지만,
죽은 왕은 질서였다.
“그래도 보내야겠습니다.”
의종이 말했다.
구휼은 그를 바라봤다.
“무엇을.”
“편지.”
짧은 침묵.
“누구에게.”
의종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동생에게.”
구휼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위험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승려 하나를 개경까지 보내는 일도 위험하고,
왕궁에 닿게 하는 일은 더 위험합니다.”
의종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지금이 아니면 안 됩니다.”
“왜.”
“사람이 가장 많을 때,
가장 잘 숨을 수 있으니까.”
구휼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
“팔관회.”
의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려의 팔관회는 왕실과 불교가 함께 여는 가장 큰 의례였다.
왕궁과 개경의 거리가 등불로 채워지고,
승려와 귀족, 군인과 상인, 외국 사신까지 한데 섞이는 밤.
그 속이라면
승려 하나쯤 더 들어가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구휼은 눈을 내리깔았다.
개경의 기억이 떠올랐다.
등불.
광장.
젊은 왕.
그 곁에 서 있던 어린 왕자.
형을 바라보던 작은 눈빛.
구휼은 알고 있었다.
그 어린 왕자가 지금 왕좌에 앉아 있다는 것을.
“누군가를 보내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나보다 젊고,
나보다 말이 적은 아이가 있습니다.”
의종은 옅게 웃었다.
“말이 적은 사람은
늘 더 믿음직스럽지.”
구휼도 미세하게 웃었다.
“그러나 더 많은 걸 봅니다.”
그날 밤, 의종은 편지를 썼다.
종이는 거칠었고
붓은 오래되었지만
글씨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길게 쓰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짧아서
읽는 사람이 더 오래 붙잡히는 말들이었다.
나는 죽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아직 숨이 남아 있다.
나라를 흔들 생각은 없다.
다만 형제가 형제를 잊지 않기를 바란다.
살아 있으되, 나타나지 않겠다.
마지막에는 이름을 쓰지 않았다.
쓸 필요가 없었다.
구휼은 편지를 접어 봉했다.
그리고 아무 문양도 새기지 않은 봉투에 넣었다.
“왕의 편지 같지 않습니다.”
구휼이 말했다.
의종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야 합니다.”
“왜.”
“왕이 보낸 편지면
누군가 죽게 되니까.”
보름 뒤, 개경.
팔관회의 밤은 눈부셨다.
궁궐 앞 광장에는 수천 개의 등이 떠 있었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옷과 소리와 기도로 한 덩어리가 되어 움직였다.
젊은 승려 하나가 군중 속을 지나갔다.
구휼의 제자였다.
그는 아무와도 눈을 맞추지 않았고,
누구도 그를 기억하지 못할 얼굴이었다.
그 얼굴로 그는 궁궐 뒤편 좁은 통로까지 들어갔다.
왕을 보필하던 내관 하나가 나타났다.
승려는 아무 말 없이 봉투를 건넸다.
내관은 그 봉투를 받아들고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물었다.
“누가 보냈는가.”
승려는 답하지 않았다.
내관은 더 묻지 않았다.
팔관회의 밤이었다.
모든 것이 시끄러웠고,
그래서 가장 위험한 것이 가장 조용히 오갈 수 있는 밤이었다.
명종은 그 편지를 혼자 읽었다.
등불은 낮았고
방 안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형의 글씨였다.
그는 단번에 알았다.
죽은 형의 글씨.
아니,
죽은 것으로 처리된 형의 글씨.
명종은 끝까지 읽었다.
그리고 한동안 편지를 내려놓지 못했다.
손이 약하게 떨렸다.
왕의 자리에서는
형제가 오래 남지 않는다.
그러나 그 편지는
왕이 아니라 동생을 찾고 있었다.
명종은 답신을 길게 쓰지 않았다.
그 역시 짧았다.
형님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아지면
나라가 다시 피를 흘립니다.
그러니 형님은 죽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형님이 살아 있는 것을 압니다.
서명은 남기지 않았다.
왕의 답신이 아니라,
동생의 답신이었기 때문이다.
답신은 다시 진주 외곽의 폐암자로 돌아왔다.
구휼은 편지를 건네고 말없이 물러났다.
의종은 봉투를 열었다.
읽는 동안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끝까지 읽은 뒤에야
그는 아주 낮은 숨을 내쉬었다.
“내 동생이 왕이 되었구나.”
구휼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의종이 스스로 정정했다.
“왕좌에 앉았구나.”
구휼이 그제야 말했다.
“왕좌와 왕은 늘 같지 않습니다.”
의종은 옅게 웃었다.
“형제도 늘 같지 않고.”
바깥에서는 풍경이 다시 울렸다.
딸랑—
“죽은 왕이 돌아가면
나라가 흔들리겠지.”
의종이 말했다.
구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왕은 죽은 겁니다.”
“하지만 사람은?”
구휼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분명하게 말했다.
“사람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의종은 편지를 접었다.
그리고 등불 가까이 가져갔다가, 끝내 태우지 않았다.
“이건 남겨야겠군.”
구휼이 물었다.
“왜.”
의종은 창밖의 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누군가는 죽은 왕이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의 말을 기억해야 하니까.”
한참 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거제로 가겠습니다.”
구휼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둔덕기성.”
“그래.”
“왜 하필 그곳입니까.”
의종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내가 가장 오래 폐왕으로 머물렀던 곳이니까.”
바람이 암자를 지나갔다.
풍경이 다시 한 번 낮게 울렸다.
딸랑—
그 소리는
죽은 왕을 보내는 소리 같기도 했고,
살아남은 사람을 깨우는 소리 같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