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왕 그리고 승려
밤이 깊어지자 숲이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진주의 산은
낮과 밤이 전혀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낮에는 평범한 야산처럼 보였지만
밤이 되면 길이 사라졌다.
의종은 천천히 걸었다.
몸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숨은 짧았고, 발걸음은 무거웠다.
그래도 멈출 수는 없었다.
진주에는 눈이 너무 많았다.
관아에는 감시가 있었고,
성문에는 병사가 있었으며,
길목마다 소문이 돌고 있었다.
왕은 죽었다.
그 문장은 도시를 안정시키고 있었다.
살아 있는 왕은 불안이지만 죽은 왕은 질서였다.
그래서 그는 낮에 움직이지 않았다.
낮에는 동굴 속에 몸을 숨기고
밤이 되면 산을 따라 이동했다.
죽은 사람처럼.
그렇게 며칠을 움직였을 때였다.
멀리서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딸랑—
바람에 흔들리는 작은 금속 소리였다.
풍경.
의종은 멈췄다.
이 산 속에서 풍경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사람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천천히 걸었다.
숲이 조금씩 열렸다.
그리고 오래된 암자가 나타났다.
작은 절이었다.
기와는 반쯤 내려앉았고
처마는 군데군데 무너져 있었다.
사람들이 버리고 떠난 지 오래된 곳처럼 보였다.
하지만 완전히 버려진 곳은 아니었다.
처마 끝에서 풍경이 흔들리고 있었고
문틈 사이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의종은 잠시 서 있었다.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그때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누구요?”
의종의 눈이 조금 커졌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등불을 들고 한 승려가 서 있었다.
늙은 승려였다.
그러나 눈은 놀랄 만큼 또렷했다.
승려는 의종을 한 번 바라보았다.
발.
옷.
그리고 얼굴.
모든 것을 천천히 살폈다.
하지만 놀라는 기색은 없었다.
“밤에 산을 오르는 사람은
대개 길을 잃은 사람입니다.”
그가 말했다.
“들어오시겠습니까.”
의종은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암자 안은 작았다.
부엌과 방이 하나씩 있을 뿐이었다.
승려는 말없이 물을 건넸다.
의종은 그릇을 들고 한참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마셨다.
따뜻한 물이었다.
몸이 조금 풀렸다.
“다치셨군요.”
승려가 말했다.
의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승려는 더 묻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등불이 흔들렸다.
의종의 시선이 잠시 멈췄다.
그리고 기억이 떠올랐다.
개경.
팔관회 밤.
등불이 바다처럼 펼쳐졌던 날이었다.
왕궁 앞 광장에는
사람이 끝없이 모여 있었다.
승려들.
악사들.
외국 사신들.
그리고 그 속에서
젊은 승려 하나가 서 있었다.
사람들 틈에서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흐르는 물 속의 돌처럼.
그 승려의 눈이 잠깐 의종을 바라봤다.
그 눈은 이상하게도
왕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사람을 보는 눈이었다.
그리고 그 승려가
바로 지금 눈앞에 앉아 있는
구휼이었다.
의종은 그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나 말하지 않았다.
구휼도 말하지 않았다.
둘 다 모르는 척했다.
그때 승려가 말했다.
“이 절은 오래 전에 버려진 절입니다.”
“지금은 저 혼자 지키고 있습니다.”
“이름은 구휼입니다.”
의종의 눈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구휼.
낯선 이름이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
개경.
팔관회.
등불이 바다처럼 펼쳐지던 밤.
젊은 승려 하나가
사람들 틈에서 조용히 서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승려의 눈이 유난히 깊었던 기억.
의종은 잠시 그 기억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나는—”
말을 멈췄다.
이름을 말할 필요가 없었다.
승려도 묻지 않았다.
구휼은 등불 심지를 조금 다듬었다.
“여기서는 이름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말했다.
“몸이 먼저입니다.”
의종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웃었다.
아주 희미한 웃음이었다.
“승려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구휼은 고개를 저었다.
“필요한 말을 하지 않을 뿐입니다.”
의종은 잠시 승려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분명히 알고 있다는 흔적이 있었다.
하지만 구휼은 끝까지 묻지 않았다.
“이 산은 조용합니다.”
그가 말했다.
“사람들이 올라오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을 찾으러 올 이유도 없으니까요.”
의종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 말은 정확했다.
지금 세상은 그를 찾지 않을 것이다.
왕은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구휼은 작은 약상자를 가져왔다.
천천히 상처를 살폈다.
“칼이 깊이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운이 좋으셨습니다.”
의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구휼은 붕대를 감으며 말했다.
“한동안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곳에 머무르십시오.”
의종은 눈을 떴다.
“왜 나를 돕는 겁니까.”
구휼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세상에서 흔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죽어야 할 사람이 아닌데
죽는 경우는 드뭅니다.”
의종은 승려를 바라봤다.
구휼은 미소도 짓지 않았다.
그는 단지 등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일처럼.
“여기서는 안전합니다.”
“적어도 한동안은.”
의종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밖에서는 다시 풍경이 울렸다.
딸랑—
바람이 암자를 지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의종은 처음으로 생각했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