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기 전의 얼굴들

왕이 되기 전의 시간

by 조아

폐암자의 밤은 깊었다.


산속이라 바람이 거의 닿지 않았는데도,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이 가끔씩 미세하게 울렸다.


쇳소리라기보다
기억이 흔들리는 소리 같았다.


의종은 마루 끝에 앉아 있었다.


촛불 하나가 방 안을 겨우 밝히고 있었다.


그 빛 위에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명종의 편지였다.


그는 이미 여러 번 읽었다.
그러나 다시 펼쳤다.


글씨는 단정했다.


왕의 글씨였다.


하지만 그 안에는
어릴 적 서책을 배우던 아이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의종의 손이 잠시 멈췄다.


종이 위의 문장은 명령도 아니었고, 정치도 아니었다.


그저
형을 부르지 못하는 동생의 말이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의 풍경이 조용히 떠올랐다.


ChatGPT Image 2026년 3월 24일 오전 07_55_53.png


개경의 궁궐 뜰이었다.

햇빛이 넓게 깔린 날이었다.


어린 명종은 늘 형을 따라다녔다.


활을 들면 뒤에서 조용히 지켜봤고,
말 위에 오르면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눈을 반짝였다.


“형님.”


그는 늘 그렇게 불렀다.


의종이 돌아보면
명종은 이미 웃고 있었다.


“또 따라왔느냐.”


“형님이 가는 곳이 재미있습니다.”


그때의 명종은 아직 왕이 아니었다.


그저 형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의종은 그 기억 속에서 잠시 머물렀다.


그 시절에는
아무도 왕이 아니었고, 아무도 서로를 의심하지 않았다.


어느 날 궁 안이 소란스러웠다.


궁녀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복도에는 낮은 목소리들이 오갔다.


의종은 어린 명종의 손을 잡고 달렸다.


방 안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날 신종이 태어났다.


ChatGPT Image 2026년 3월 24일 오전 08_01_53.png


공예태후가 아이를 안고 있었다.


“이 아이가 너희 막내다.”


의종은 잠시 그 작은 얼굴을 내려다봤다.


신종은 조용한 아이였다.


울음도 크지 않았다.


명종이 그의 옆에서 속삭였다.


“이제 형님은 아우가 둘입니다.”


그 말에 의종은 웃었다.


그날 처음으로
그는 누군가의 형이 아니라 누군가의 맏형이 되었다.


그 감각은 오래 남았다.


왕이 된 이후에도
그날의 감각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멀리서 누군가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종이었다.


그는 가까이 오지 않았다.


대신 오래 바라보았다.


인종은 말이 많은 왕이 아니었다.


꾸짖는 일도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시선은 무거웠다.


“왕자는 웃을 때도 조심해야 한다.”


그 말은 짧았지만 오래 남았다.


어린 의종은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그날 이후
자신의 웃음을 한 번 더 생각하게 되었다.


왕이 된다는 것은
웃음 하나도 마음대로 둘 수 없다는 뜻이었다.


어머니는 달랐다.


공예태후는 그를 왕자로 대하지 않았다.


그녀는 늘 먼저 물었다.


“밥은 먹었느냐.”


그 말은 단순했지만 궁 안에서는 가장 드문 말이었다.


왕을 향한 말이 아니라 아이를 향한 말이었다.


의종은 그때마다 대답을 늦추곤 했다.


그 질문이
이상하게도 오래 붙잡히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손은 늘 따뜻했다.


왕이 된 이후에도 그 온도만은 잊히지 않았다.


의종은 눈을 떴다.


폐암자의 어둠이 다시 돌아왔다.


촛불이 흔들렸다.


편지는 여전히 그의 손에 있었다.


명종은 이제 왕이다.


신종도 살아 있다.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 또한 돌아갈 수 없는 시간 속에 있다.


그는 천천히 편지를 접었다.


종이의 감촉이 손끝에 남았다.


그 감촉은 이상하게도 과거보다 현재에 더 가까웠다.


왕좌는 하나였다.


그러나 형제는 셋이었다.


그 사실은 왕이 된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고,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ChatGPT Image 2026년 3월 24일 오전 08_05_20.png


밖에서 바람이 불었다.


풍경이 다시 울렸다.


의종은 마루 끝에서 일어섰다.


산 아래는 보이지 않았다.


안개가 여전히 길을 가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이제 떠나야 한다는 것을.


돌아갈 곳은 없었다.


개경은 이미 지나간 곳이었고, 계림은 그를 죽인 곳이었다.


남아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거제.


그곳은 그가 왕으로서 가장 깊이 떨어졌던 곳이었고,
동시에 마지막으로 사람으로 남아 있었던 곳이었다.


의종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확인하러 가는 길이라고.


그가 무엇을 잃었는지, 그리고 무엇이 아직 남아 있는지를.


촛불이 짧게 흔들렸다.


그는 그것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불을 껐다.


어둠이 방 안을 채웠다.


이제 빛은 필요하지 않았다.


길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남은 것은 그 길을 걸어가는 일뿐이었다.


그는 문 밖으로 나섰다.


밤은 여전히 조용했다.


그러나 그 조용함 속에는 이동의 기척이 있었다.


죽은 왕이 다시 길 위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토요일 연재
이전 07화폐암자의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