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화면 출처-네이버 웹툰[모죠의일지]
... 없으면서 있는 체하고, 비었으면서 가득 찬 체하며,
작으면서 큰 체하면, 떳떳하기 어렵다.
亡(無)而爲有 虛而爲盈 約而爲泰 難乎有恒矣。
망(무)이위유 허이위영 약이위태 난호유항의。
- 論語(논어) 述而篇(술이편)- 25章장 중에서 일부 발췌
사람들은 각자의 흑역사를 안고 살아간다.
떠오르면 "아, 진짜 이런 미친..."이라고 되뇔 만큼 말 그대로 쪽팔리고 수치스럽고 진짜 내 목을 내가 조르고 싶을 만큼 창피한 기억들.
나야말로 흑역사 대회가 열리면 TOP 10 안에는 들거라 믿어 의심치 않을 만큼
정말 정말 정말 쪽팔린 순간들로 인생을 채워왔다.
내 쪽팔린 순간들이 나의 전부는 아닐진대
언젠가부터 쪽팔린 내가 너무 싫어져 나를 부정했다.
체중계에 올라 56킬로그램이 찍히면 부정했다.
아냐, 지금 많이 먹고 옷도 입고 좀 입고 있어 그렇지, 화장실 갔다 와서 싹 씻은 상태에서 알몸으로 재면 55킬로대일 거야.
이렇게 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 습관이 방금 전에 체중을 쟀어도 내 체중이 어땠는지 기억하질 못했다.
시험을 준비하면서 몇 번이나 봤었던 내용이 기억나질 않으면
부정한다. 아니야, 내가 기억 못 한 게 아니라 실수야 실수.
틀렸던 문제를 맞았다고 동그라미를 쳐놓으니 다음에 또 틀리고, 시험은 계속 떨어졌다.
나이 마흔이 넘도록 이력서에 쓸 스펙이랄 것도 없고
그렇다고 쓸만한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돈도 모아놓은 것이 없는 걸 그 누구보다 내가 잘 알면서
나 자신을 부정한다.
내가 가진 하찮은 자격증 두어 개를 엄청 능력이 있는 듯 부풀리고,
장사 말아먹고도 종합소득세 신고 좀 했다고 '경험 '을 했다며 재무제표나 경영에 대해 아는 것처럼 부풀리고,
돈도 꿍쳐놓은 게 있는 듯 내가 나를 속인다.
나에 대한 거짓말을 너무 오랫동안 하다 보니
평소에 정말 내가 돈도 좀 있고, 뭔가 세상에 내세울만한 스펙도 있고, 체중이 그렇게 많이 나가지 않는다고 착각하며 살다가
어느 날 아주 우연한 순간에 문득 현실을 깨닫게 된다.
너무나 초라한 무직의 아줌마가 대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서 잔뜩 두려움에 휩싸인 내 본모습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내 거짓말들을 확 물어뜯어버리는 것이다.
며칠 전 엄마 생신 모임이라 오랜만에 친정식구들이 다 모였다.
시국이 이렇다 보니 우리 집에서 10명의 어른들과 4명의 초등학생들과 2명의 만 3세 직전의 아기 둘, 이렇게 16명이 벅적벅적 모여 이 얘기, 저 얘기하다 보니
잠에서 깨듯 내가 나 자신을 속이고 있었던 것을 순간 깨달았다.
살 빼려고 5개월 가까이 노력해서 3~4킬로그램 빼긴 했지만, 아직도 과체중 상태인 건 마찬가지고.
일단 다리 모양을 예쁘게 다듬는 노력은 하질 않아 "하비" 체형 그대로인데
대체 난 어떻게 내게 거짓말하여 날 속이고 있어 왔던 걸까.
제부들과 여동생들이 약간 줄은 내 체중을 알아봐 주길 바랐던 걸까.
알아주면 또 달라지는 게 무엇인가.
내가 줄여야 하는 체중은 아직 남아있는 건 마찬가지인데.
신랑한테도 내가 결혼 전에 모아놓은 돈 중 결혼할 때 쓰고 남은 돈이 꽤 많다고 부풀려 말하고
그 거짓말이 나 자신마저 속여
차도 없고, 10년 넘은 정장도 아까워 버리지도 못하면서 누추해진 옷을 입지도 못하는 가난한 삶을 살면서도
현금 좀 가진 것처럼 이사를 앞둔 제부한테 혹시 현금 급전으로 필요하면 말씀하시라 말하다니.
막상 말하면 천만 원도 꿔줄 능력 없으면서.
동생들과 제부들은 다들 공무원 시험 합격해서 경찰공무원, 소방공무원, 교사, 국립대 교직원이니
나보다 사회적 성취를 한 사람들인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
내가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도
20년~25년 전에 내가 그 애들보다 성적이 조금 좋았던 기억만으로
나를 한껏 부풀리며 살아왔다.
제부들이나 동생들은 날 치켜세워주는 말밖엔 할 수 없으니 그저 공치사로 내게 칭찬의 말을 하는 것일 뿐인 걸 아는 데도
이런저런 달콤한 말들만 골라서 날 속여왔다.
온갖 시험에서 떨어져 인생 말아먹고,
겨우 차린 학원도 10년도 못 채워 거의 망할 위기에 처해 권리금 한 푼 못 받고 고용인에게 넘긴 인생 2회 차로 말아먹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너무 아팠나 보다.
그래서 항상 내가 나 스스로에게 떳떳하지 못하고, 자존감이 낮았던 거구나.
亡(無)而爲有하며 (없으며 있는 체하고)
虛而爲盈하며 (비었으며 가득 찬 체하고)
約而爲泰했기 때문에 (작으며 큰 체했기 때문에)
이제라도 나를 위해서
남은 인생이라도 나 자신에게 떳떳하게 살기 위해서
그저 있는 그대로 나를 그대로 바라보려 노력하겠다.
난 56킬로그램이고, 통장에 있는 건 몇 백 뿐이고, 경력이라곤 시험 불합격뿐이다.
... 말하고 나니 너무나 아프다.
論語(논어) 述而篇(술이편)- 25章장
子曰 聖人을 吾 不得而見之矣어든 得見君子者면 斯 可矣니라。
자왈 성인을 오 부득이 견지 의어든 득견군자자면 사 가의 니라。
子曰 善人을 吾 不得而見之矣어든 得見有恒者면 斯 可矣니라。
자왈 선인을 오 부득이 견지 의어든 득견유항자면 사 가의 니라。
亡(無)而爲有하며 虛而爲盈하며 約而爲泰면 難乎有恒矣니라。
망(무)이 위유 하며 허이위영 하며 약이 위태면 난호 유항 의 니라。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성인(요, 순, 우, 탕)을 내가 만나 뵐 수 없다면,
군자(선을 행하고 게으름이 없는 제후)라도
만나 뵐 수 있으면 다행이겠다.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선인(지위가 없는 일반적인 선인)을 내가 만나볼 수 없다면,
항심(恒心: 일정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나볼 수 있으면 다행이겠다.
<항심을 갖지 않은 사람은> 없으면서도 있다고 여기며,
비었는데도 가득 채웠다고 여기며,
조금 가지고 있으면서 많이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라면 항심을 가지고 있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