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소도시에는 주소와 상관없이 '추첨'을 통해 입학시키는 "00대학교부설초등학교"가 있다.
그 학교가 다른 초등학교보다 어떤 점이 더 좋고 왜 인기가 있는지 잘은 모르겠으나
내가 어렸을 때 이 소도시로 이사 오면서 우리 부모님 또한 그 초등학교(그 당시는 국민학교)에 입학시키려니까 면담한 부장교사 선생님이 티브이를 사서 학교에 기증하면 입학시켜준다 해서 부모님이 그만둔 일이 있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시기에 전학을 문의하며 정말 학교에 티브이와 현관 앞에 커다란 거울까지 기증(이라고 쓰고 강취라고 읽어야 하나?)하며 그 학교에 들어간 아이네 집은 전학허가가 확정된 그날 외식하며 축하파티를 했다나.
여하튼, 이 도시에서는 50여 년간 매년 "부설초" 추첨은 많은 학부모들의 관심사인데
난 어린 날의 저 안 좋은 기억과 내가 사는 아파트와는 멀리 떨어져 있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부설초 추첨 원서를 내야할 일이 생겼으니
첫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던 재작년까진 난 학원을 운영 중이었다.
학원 일이라는 특성상 오전에는 시간이 여유롭지만 저녁이 없다.
일찍 끝나도 밤 9시, 늦게 끝나면 11시가 다 되기에 아이들을 아이들은 주중엔 시부모님 집에 맡겨놓은 상태였다.
유치원 때까지만 시댁에 맡기고, 초등학교 때부턴 매일 데리고 살 작정이었다.
돌봄 끝내고, 내 학원으로 와서 저녁은 늘 배달시켜먹는 백반집에서 먹이면 되겠고, 애 아빠가 퇴근하면서 애들 집에 데려가면 되겠지 하는 나름의 계획도 있었는데
시어머님이 초등학교 저학년 애가 밤늦게까지 집에 못가고 얼마나 힘들겠냐며, 1학년 때까지 봐주겠으니 부설초에 원서라도 내보라고 했다.
시부모님이 사시는 아파트는 부설초와 가까웠다.
아이를 봐주시려는 마음이야 감사하지만, 그래도 초등학교 때부턴 내가 케어할 수 있는데, 애 공부도 봐줘야 하는데 등등 (지금 생각하면 오만하기 짝이 없는 착각이다 )의 고민도 있었지만,
아이들 주양육자이신 시어머님의 요구에 반발하기에도 뭣해서 기대도 없이 부설초에 원서를 넣었다.
안 되겠지, 란 마음이 컸다. 경쟁률은 2:1 정도. 추첨에서 떨어지는 게 더 낫지 않을까란 생각도 했다.
그리고 추첨 결과는 '당첨'.
추첨장에서의 당첨된 학부모들 사이에 터져 나오던 환호가 아직도 귓가에 울리는 듯하다. 이게 그렇게 좋아할 일이구나. 놀라운 마음보다 착잡하고 복잡했다.
첫애를 초등 1학년 때까지 시댁에 맡겨야 하나, 하긴 둘째가 아직 유치원 다니는데 사실 지금 데리고 오기엔 사정이 좀 안 좋지? 봐주신다면야 감사하지. 1학년짜리가 내 학원에 와서 언제 퇴근할지 모르는 아빠를 기다리는 것도 힘든데, 유치원생까지. 그리고 걔들이 학원 분위기도 흐리기도 하니까. 그래. 좋은 일이다!
라고 생각을 정리한 뒤 시어머니, 남편과 부설초에 첫애를 입학시키면서 연년생인 둘째가 초등 입학하는 내년까지 맡기기로 다시 얘기가 되었다.(어머님, 이 자릴 빌어 정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어려운 결정이셨을 텐데 먼저 말씀해주셔서...)
여전히 부설초에 대한 떨떠름한 기억을 안고 있는 나로선, 학교 입학 전 설명회라던가, 입학식에서 교장선생님이 주구장창 강조하시던 "선택받은 여러분~", "올해 여러분 가정에서 제일 좋은 일은, 우리 학교에 아이가 당첨된 것~" " " @@도 최고 수준의 선생님께 최고의 교육을 받을 행운을 가진 아이들~" 운운의 축사에 매우 불편해하면서도 한편으론 '그래, 우리 애는 선택받았구나. 역시 운이 좋은 울 딸내미. 최고의 교육 오호~' 하고 언젠가부터 자부심마저 느끼고 있었다.
유난 떠는(?) 학교인 만큼 초등학생들이 교복을 입기에 30만 원어치 교복 체육복을 사고 (국회의원님들, 국정감사에 교복회사 독과점 좀 조사 부탁드립니다. 30만 원이 아깝다기보단, 그런 저질을 30만 원이나 주고 사야 하는 게 너무 아깝습니다!)
드디어. 입학.
첫 주는 아이들 적응기간이라 돌봄도 하지 않고 1시에 아이들을 데리러 가야 했다. 학원 수업보단 이른 시간이라 워킹맘이면서도 아이를 케어할 수 있다는 데에 엄청난 만족감을 느꼈었다.
그다음 주부턴 돌봄이 끝나면 바로 피아노 학원 차가 아이를 픽업해가고, 피아노 학원 끝나면 할머니 집에 가서 저녁 먹고 씻고 하면 바로 잘 시간. 완벽해!
라고 내 머릿속의 '완벽한 계획'을 그리며 도취되어 갈 때
학교를 5번 갔다 와서 아이가 하는 말.
"엄마 나 엄마네 집에서 살면서 ㅁㅁ초등학교로 전학 가면 안돼?"
ㅁㅁ초등학교는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근처 초등학교다. 아이가 유치원 다닐 때부터 초1이 되면 이제 매일 엄마와 살면서 엄마네 집 근처 초등학교에 다니고 저녁도 엄마네 학원에 와서 먹을 거라고 얘기해 준 터였다.
하지만, 동생이 아직 유치원에 다녀야 하는 상황이니 딸만 엄마 집으로 오긴 힘들고(둘째가 어렵게 당첨된 병설유치원에 다니고 있는데, 첫애 초등학교 입학시키며 둘 다 우리 집으로 데리고 오려고 집 근처인 ㅁㅁ학교 병설유치원에 원서 내봤으니 추첨에서 떨어졌다) 할머니네에 1년 더 살게 되었다는 어른들의 결정에
딸애는 꽤 불만스럽다가, 교복을 맞추며 기분이 좋아진 데다 매일매일 치마를 입고 다닌다는 사실에 부설초를 다니게 된 것이 좋다고 했다가, 또 금요일 저녁에야 엄마네 집으로 왔다가 주중엔 할머니네에서 자는 게 싫은 상태였다.
한 달 넘게 딸이 "왜 엄마 집에서 같이 못살아?" "왜 할머니 집에서 살면서 이 학교 다녀야 해?"에 대한 질문과 대답을 반복해왔는데, 또 시작이구나 싶어 심드렁하게
"이왕 교복도 맞췄으니까 올해 1년만 다녀보기로 했잖아"
둘째도 부설초에 당첨되면 아예 우리가 시댁 근처 아파트로 이사 오면 되고,
둘째가 부설초 추첨에서 떨어지면, 그땐 미련 없이 우리 집으로 데리고 와서 ㅁㅁ 초등학교로 둘 다 보내면 된다고 정리가 된 상태였다.
더 생각하기 싫어 딸애의 말에 "또 왜 그래~"라며 대화를 그만두려 하자
딸애가 내 귓구멍에 핵폭탄을 쏴 터트렸다.
"친구들이 나 따돌려. 난 이 학교 싫어. 나만 외톨이란 말이야"
... 겨우 1주일 학교 다녔는데 벌써 따돌림을 당할 수 있는 거야?
무엇보다, 내 딸이 뭐가 부족해서 따돌림을 당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1시에 매일 데리러 오는 워킹맘이라는 자부심,
내 머릿속에서만 잘 정리된 완벽한 계획에 대한 만족감
이 따위가 다 무엇이냐!
내 딸이 지금 우는데! 정말 난 바보야! 난 멍청이 엄마라고!
그 당시는 몰랐는데 지금 와 돌이켜 보면 1시에 하교시키면서도 난 얼른 피아노 학원에 애를 데려다 놓고 내가 운영하는 학원으로 돌아가야 하는 조급함에 딸의 얘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엄마 운전하는 데 방해하지 말고 이따 저녁때 얘기해"
막상 저녁때 딸이 전화하면 "여태 안 잤어? 얼른 자. 엄마는 아직 할 일 남았어. 끊어"였다.
유치원 때도 소문난 울보였던 딸이 전화기 너머로 훌쩍훌쩍 우는 소릴 내도 ' 또 저러네 또' 란 마음이 컸던 것이다.
금요일 밤.
11시에 퇴근해서 다음날 아침에 먹을 아욱 된장국을 끓이려고 아욱과 조갯살을 좀 사 왔다.
아욱은 살짝 씻어 데쳐내어 끓여도 좋지만 좀 더 부드럽게 먹으려면
얼룩진 흰 면티를 빨 듯 바작바작 아욱을 괴롭히며 씻어내면 한결 부드러워지고 풋내도 없어지고 아욱 잎이 갖고 있는 독성도 빠진다 한다.
9시면 재우려 온 집안 불을 끄고 10시 안엔 꼭 재우는 시어머님의 교육에 맞춰 나도 따르려 하지만
그 날은 애들이 놀고 싶은 대로 놔뒀다. 이도 닦기 싫다 해서 냅뒀다. (자기 전에는 닦게 했다.)
친정엄마께서 직접 담그신 5년 묵은 집된장을 풀고
양파를 송송 썰고, 냉동실 구석에 찌그려 박혀 있던 자른 건표고도 용케 찾아내서 몇 조각 넣고 된장국이 보르륵 끓어오르면
아욱과 조갯살을 같이 넣고 한번 더 끓이면 끝.
멸치, 다시마로 국물을 내도 좋다지만, 내가 제일 선호하는 건 역시 조개국물이다.
그냥 바지락을 넣고 끓이는 게 더 맛있지 않냐 하지만, 전에 해감을 잘 못한 게 있었는지 한 솥 다 버린 다음부턴 그냥 마트에서 조갯살을 산다.
여하튼, 라면 끓이는 것만큼 초간단 아욱 된장국을 끓이며 요리에 관심 있는 둘째가 기웃거리며 조갯살 넣는 것도 도와줘 한결 더 수월히 완성한 다음
질길까 봐 잘라놓은 아욱 줄기를 정리하는데
첫째가 "아까워라" 하는 말에
시원하게 한 마디 해줬다.
"아까울 거 없어! 니 입에 질기면 잘라버리면 돼! 이거 안 먹어도 부드러운 잎사귀가 저렇게 많은데"
그리고 딸. 저 부드러운 잎사귀도 물에다 박박 많이 문질러야 저렇게 되는 거야.
널 힘들게 하는 친구는 잘라내고. 너 또한 이 시련을 이겨내면 훨씬 부드러워질 텐데. 어떻게 전학은 안 가면 안 되겠니? 1년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