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공부는 싫어. 게임만 좋아 - 핫케익

by 루치아

딸이 따돌림받는다고 얘기한 상황은 이렇다.


이미 아이들끼리 00 대학 부설 병설유치원을 같이 다니고, 또 부설초 근처 아파트에 살면서(이 소도시에도 학군이란 게 있었다니! 학원 운영하면서도 나만 몰랐던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친한 경우도 있었고,


그런 케이스가 아닌 경우는 서로 친구를 탐색하는 기간에 딸은 같은 피아노 학원을 다니는 아이들 두 명과 같이 친해진 모양이다.(오. 삼총사의 운명은 늘 한 명이 내쳐지는 결과로 마무리되는 것?)


입학 전부터 다녔던 피아노 학원에서 서로 레슨 시간이 안 맞아 마주칠 기회가 없기도 했고, 얼굴을 봐도 이미 각각 노는 무리가 있어 별로 말을 안 했는데, 같은 반이 된 걸 확인 후 서로 의지를 하며 급속도로 서로 친해진 듯하다.


편의상 아이들을 A, B로 칭하자면,


A는 부모님이 맞벌이하시며 용돈을 풍족히 주시는 편이고, 아이도 잘 퍼주는 성격이다.


아마 A는 그저 친구가 생겼다는 기쁨에 순수한 마음으로 친구들에게 먹을 걸 사줬을 것이다.


내 딸과 B는 한 3일을 많이 얻어먹었다. 편의점에서 딸기 우유, 핫바 등의 먹을 것부터 학교 근처 문방구에서 슬라임까지 선물로 받아왔다.


딸이 슬라임 선물 받아온 날 자랑하기에


"얻어먹기만 하면 안 돼. 너도 A에게 뭐 사줘."

라고 했더니

"난 돈이 없는걸."

당당히 대답하던 딸의 목소리에


이번 주엔 용돈을 한 2천 원, 3명이니까 3천 원 줘서 얘도 뭐 하나 사주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별생각 없이 넘겼다.


그런데 A의 엄마는 자기 딸이 친구들에게 사주기만 하는 게 영 속상하셨나 보다. 당연히 이해된다. 나 같아도 속상했을 것이다. 그리고 걱정도 되셨으리라. 아무리 어려도 요즘 같은 세상에 혹시 우리 딸이 친구들이 강요에 못 이겨 사주는 건가? 하는.


내가 A의 엄마에게 캐물은 게 아니라 그저 나의 뇌피셜(?)에 그치는 망상 일지 모르지만


아마 집에서 A의 어머니는 A에게 "왜 너만 사주냐, 너도 친구들에게 사달라고 해라."라고 하고

또 여태 사준 목록들을 죽 들으며 인당 한 3~5천 원씩 쓴 듯 하니, A도 그 정도는 받으라고 한 모양이다.


초등 입학 4일 차인 내 딸은 갑자기 채무자가 된다.


A가 3천 원어치 과자를 사주던가, 돈을 내놓으라고 한다. 딸은 돈이 없다고, 주말에 엄마가 돈을 주기로 했으니 다음 주에 사준다고 한다.


그러자 A는 다음 주에 갚으면 이자를 쳐서 6천 원이 되고, 만약 다다음주까지 못 갚으면 1만 원이 될 거라고 빨리 사라고 했단다.


그러자 B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동전을 탈탈 턴다.


그 돈으로 A에게 빚(?)만 갚으면 좋았으련만


착한 B는 함께 있는데 한 사람에게만 주는 게 뭔가 불합리하다 느꼈나 보다. 동전이 약 2000원어치 좀 안되게 있었는데. A와 내 딸에게 반반 나눠 각각 700~800원 정도 나눠줬다.


내 딸은 돈을 주니까 또 받아왔다.


그 날 저녁 딸은 웃으면서 "나 빚만 늘어서 어쩌지"라고 했다.


애가 웃길래 나도 웃어넘겼다. "너도 사주면 되지."


딸의 입학 5일 차.


딸은 학교에 가자마자

A는 3천 원을 당장 갚지 않으며 6천 원이 될 거라고 했고

B 또한 어제 준 동전들의 또 두 배를 갚으라고 했다.

딸은 다음 주에 꼭 갚는다고 약속하면서도 뭔가 심통이 난 듯 하다.


그리고 결정적인 사건으로

아이들은 놀이시간에도 셋이서 달리기 시합을 하는데 원래 약속되었던(이건 내 딸의 의견이므로 사실과 다를 수 있음을 미리 알려둔다.) 나무 둥지를 찍고 오려고 달리는 딸의 뒤에


A와 B는 "뭐해~ 여기 벽 찍고 오는 거야~네가 꼴찌야."라고 말하며 웃었고

딸이 처음 약속한 건 나무라며 항변하자

둘은 벽으로 바뀌었다고 해,

딸은 놀이시간부터 4교시가 끝날 때까지 자기가 따돌림을 당했다며 운 것이다.


(팩트와 추측이 섞여있는 전말을 쓴 글이라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혹시나 A, B를 욕할까 봐 너무 겁이 난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게 2년이 다 되어가는 일인데, 딸은 1학년 내내 이 아이들과 잘 지내고, 학년이 올라가 다른 반이 되었어도 아직도 A, B와 같은 피아노 학원 다니며 잘 지낸다.


난 그때도, 지금도 A, B 가 착한 애들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 아이들 엄마들도 만나봤는데(B의 엄마는 내가 고등학교 때부터 잘 알아왔던 이웃이다.) 두 분 다 괜찮은 사람이다.


A, B와 그 아이들 엄마를 욕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어린아이들끼리 서로 산수계산이 잘 안되었고, (자기가 준 동전의 '두 배'를 갚으라 한 B 는 '두 배'의 의미를 몰랐다)

부모님들도 일방적인 관계가 안 좋다는 걸 알려주는 계기를 만들어준다는 것이, 아이들이 부모님께 배운 내용을 거칠게 표현했을 수도 있고,

내 딸이 친구들의 마음을 헤아리기엔 어렸고,

받는 것이 좋고, 주기는 아까운 (그게 돈이든, 슬라임 장난감이든) 욕심으로 '친구들이 저러다 말겠지'하는 안이한 생각도 했기에 이 사달이 것이다.


토요일에 A, B의 엄마들에게 전화해서 사정 설명을 했고, 같이 저녁 먹자고 해서 같이 만나 오해도 풀고, 아이들에게도 내가 직접 돈을 갚으며 딸에게 빚 독촉(?)을 그만 해달라 부탁했다.

나의 어릴 적도 돌이켜 보면 꽤 사소한 일도 내가 감당이 안 될 만큼 커져버려 고민이 된 적이 있었던 것 같다.


"데미안"에서의 싱클레어도 고작 사과를 훔쳤다는 거짓말 한 번 해서 크로머에게 몇 주간 돈을 털리고 괴롭힘을 당하지 않던가. 다들 그러면서 크나보다.


싱클레어는 부모님께 말을 하지 않고도 데미안이 해결해주었지만, 그건 소설 속에서나 있는 일이고, 현실에선 부모가 나서야 할 일이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연년생 아이를 둘이나 시댁에 맡기고 겨우 주말이나 보면서 애들은 알아서 잘 크는 거려니 착각하고 살아온 내게 딸의 "따돌림" 사건은 엄마의 책임, 의무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기회가 되었다.


학교 적응기간이 끝났다.


이제 월, 화, 목은 정규수업이 2시에 끝나고, 수, 금은 1시 10분에 끝나지만, 딸은 방과 후 수업을 신청해놓은 것도 있고, 돌봄 교실까지 가므로, 늘 학교에서 5시까진 있어야 한다.


월요일 창의수학, 화요일 미니어처, 수요일 리듬체조 수업을 듣고, 정신없이 1주일을 보내고, 금요일이 되자 딸이 오늘만 돌봄 빠지고 바로 피아노 학원 갔다가 할머니네 집에 가면 안 되냐고 묻는다.


그래. 너도 얼마나 힘들겠냐. 어른도 아침 8시 반에 출근했다가 저녁 6시 반에 들어가면 힘든데.

란 생각으로 허락해주었더니.


딸은 금요일 1시에 끝나자마자 피아노 학원 선생님께 엄마가 오늘 학원 빠져도 된다고 허락해줬다고 거짓말을 하고 피아노 학원도 빠지고 할머니네로 갔다.

아파트 근처 복지관으로 봉사활동을 하시며 점심까지 해결하시던 어머님은 오후 3시까진 늘 집에 없으시다.

또 그 당시까지만 해도 딸은 현관문 도어록 비밀번호를 외우질 못해 혼자 들어가질 못했다.


피아노 학원차량 운전기사님이 딸이 하원 할 때 늘 할머니가 아파트 정문까지 내려와 계셨는데 오늘은 안 계시는 걸 보고 이상하게 여겨 딸에게 물어봤는데 대답도 없이 내려 후다닥 달려가기에 걱정돼서 내게 전화를 했다.


난 너무 놀라 딸에게 전화를 해보니 하필이면 전화도 방전 상태다.

내 학원 수업 시간이 2시 반부터라 시간이 빠듯함에도 강사분께 좀 늦을지도 모르니 내 수업 좀 봐달라 부탁을 하고 튀어나가 시댁에 갔다


3월이면 중순이라도 아직 춥다.


그 추운데 아파트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딸을 보고서는 안심과 함께 미친 듯이 분노가 치솟아 올라 소릴 질렀다


"너 왜 거짓말했어!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왜 따뜻한 학원 안 가고 이 추운 데 쭈그리고 앉아있는 거야? 그러다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딸은 내가 화를 내든 말든 추우니까 빨리 할머니네 집 문이나 열어달란다

아니. 할머니네 가기 싫으니 날 따라오겠단다.


"무슨 소리야! 피아노 가야지"


"아 피아노 안 가. 오늘은 노는 날이야."


"뭐. 그걸 왜 네가 정하는데?"


"그럼 누가 정해. 내 일 내가 정하지."


딸 키워보시는 분들은 다 인정할 것이다. 한 7살만 돼도 말로 이기질 못할 때가 있다.


딸 말대로 이미 피아노 학원 원장님껜 안간다로 말해놨으니 다시 가긴 좀 그렇고.

엄마 학원에서 조용히 있어야 하고, 할 거라곤 책 읽는 거밖에 없는데. 피아노 학원이 싫으면 누워있을 수도 있고, 티브이도 있는 할머니네가 낫지 않겠냐고 했더니


괜찮다고, 폰 충전하며 게임하면 된다고 너무 당당하게 말하는 딸 앞에서 말문이 막혔다.


시어머니 안 계시는 집에 혼자 두느니 그냥 학원으로 달려가는 게 낫겠다 싶어 일단 차에 태우고 가는 도중에 끊임없이 걱정시키게 왜 거짓말을 했느냐란 말이 반복되는 잔소리를 했다.


"공부하기 싫으니까 그렇지."


"공부는 누구나 하기 싫어. 다들 하기 싫어도 참고하는 게 있는 거야. 초콜릿 먹는 거와 마찬가지야. 달콤한 것만 먹고 하기 싫은 양치질을 안 하면 이가 다 썩어버리잖아. 공부가 양치질 같은 거라고. 그리고 양치질하고 나면 좀 귀찮았더라도 개운해지잖아. 그것처럼 공부도 하고 또 성적도 잘 나오면 얼마나 성취감도 생기고 기분 좋은 건데."


"난 게임이나 할래."


"그렇게 놀기만 하면 이가 다 썩어버리듯 머리도 썩는다니까."


"안 썩어요. 걱정 마."


딸은 사무실 귀퉁이에서 진짜 게임만 주구장창 했고, 난 그런 딸을 내버려두기엔 또 안쓰럽고, 오늘 거짓말한 것도 이유를 따져야겠단 생각에

학원 마감을 강사분들께 부탁하고 좀 일찍 집으로 향했다.


저녁 뭐 먹을지 물으니 딸은 핫케익을 먹고 싶단다.

핫케익을 높게 쌓는 게임을 했더니 먹고 싶어졌다나.


집에 와서 전에 만들다 남은 핫케익믹스를 붓고, 우유, 달걀을 설명서에 쓰인 만큼 종이컵으로 대충 계량을 같이 만들었다.


때마침 둘째를 데리고 신랑도 집으로 들어왔다.


둘째는 누나만 먼저 엄마 집에 데리고 온 것도 화나고, 그렇게 자기는 엄마 학원에 발 못 붙이게 하면서 누나만 데려갔다고 잔뜩 화낼 요량으로 집으로 들어섰지만


핫케익 익는 달큼한 바닐라 향, 그 위에 얹혀놓은 고소한 버터향에 취해 화내는 것도 잊어버리고 자기도 핫케익을 뒤집어 보겠다며 덤벼들었다.


유통기한 간당간당한 생크림 스프레이로 생크림까지 뿌려먹으니 그럴싸하다.


딸, 공부가 하기 싫은 맘 이해해.


아직 초등 1학년이니까 공부 안 하고, 거짓말하고 학원 빠지고, 저녁 내내 3시간 가까이 폰으로 게임을 해도 이 엄마는 아직 관대할 수 있어!


하지만 한 4학년 때부턴 너 그러면 엄마 너무 불안하고, 피아노 학원 말고 수학, 영어 가르치는 학원 보낼 수도 있는데. 우리 어떡하지?


핫케익 만들 때 우유를 너무 많이 넣으면 반죽이 묽어져서 핫케익 모양이 안 나오고. 또 가루를 너무 많이 넣음 반죽 자체가 안되고, 달걀을 안 넣음 맛이 안 나듯.


공부도, 노는 것도 적당히 섞어서 하면 안 될까?


엄마도 돈 버는 학원 일에만 매달리지 않고, 딸의 엄마로서 좀 더 시간을 내고 노력할게.


라고 지키기 힘든 약속과 결심을 하는 서툰 엄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