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피아노 학원에 다닌지 두 달,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한 달이 지났다.
딸은 여전히 학교는 가기 싫고, 피아노 학원은 그나마 재밌어하다가도 가끔 빠지고 싶어한다.
그래도 언제든, 무엇이든 시간은 인간이 모든 걸 적응시켜 준다.
나는 그 이전에 딸의 친구관계라던가, 유튜브와 게임에 빠져 거짓말을 하는 딸의 모습 등 예상치 못한 변수에게 뒷통수를 호되게 맞고, 늘 '빨리빨리'란 말을 달고 살며 동동거리면서도 나름 안정화되는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던 월요일 아침, 딸과 아들에게 또 '빨리빨리'라고 재촉하며 등교 준비를 하는데
(그 당시 금요일 저녁에 애들을 데려와서 같이 주말을 보낸 뒤 월요일 아침 등교까지 내가 했다.)
가방을 챙기던 딸 입에서
"아이 X발" 이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순간, 얼음이 되었다가
"너 지금 뭐라고 하는거야?"
"뭐? X발?"
"너 그거 심한 욕인 거 몰라?"
"몰라. 그냥 학원에서 언니 오빠들이 하니까 따라 했지"
거짓말 하는 아이의 얼굴은 티가 난다. 딸은 그 말이 욕인 걸 알고 있다. 알면서도 하는 거다. 뭐라고 훈육을 해야겠다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하필 아.침.이다.
아직 잠에서 덜 깨서 양말을 신겨달라고 칭얼대는 아들도 달래가며
등교, 출근 시간 차가 밀리는 걸 감안하면 지금 나가지 않으면 지각인 상황. 더이상 딸과 입씨름 할 시간이 안되서
"그런 말 쓰지 마. 천박해보여"
란 한 마디만 하고 얼른 나갔다.
하지만 딸은 자기의 욕을 하는 모습을 들킨 것이 민망한 건 없고, 그저 내가 잔소리를 했다고 화가 난 듯 보였다.
등교하는 차 안에서
"그게 무슨 뜻인 줄 알어? '씹 할'을 줄인 말이야. '씹'은 성인 여자랑 남자랑 성행위를 한다는 뜻이고. 그래서 니가 그 욕을 하면 '너 상대방과 성행위를 할' 이란 원색적인 뜻이라고. 어린이가 할 말이 아니란 말야. 그러니까 천박해보인다고 하지."
딸이 '성행위'가 뭔지 정확히 알아듣는지 어떤지 모르지만, 요즘은 유치원 때부터 성폭력 예방 교육을 매년 받아왔기에, 어떤 남자 어른이 어린이의 신체 부위를 만지려 한다던가, 성기를 집어넣으려 한다는 등이 위험한 행동이고 부모님과 선생님께 알려야 하는 일이며, 어른이 되면 서로 합의한 상태에서 성행위로 여러분이 태어난 것이다, 정도는 배운 것으로 알고 있다.
"아 몰라. 다들 하는데. 나는 왜 하면 안되는데?"
"욕을 해서 좋은 게 뭐 있는데?"
"몰라. 스트레스가 풀려."
"니가 뭔 스트레스가 있어서"(이 말은 하지 말걸...)
"엄마가 스트레스야 엄마가! 공부도 해야고! 방과후 수업 끝나면 학원 차 타게 뛰어가라고 하고! 맨날 뭐 끝나면 빨리 뭐 해야하고! 스트레스 천지야! 천지!"
딸은 지 승질대로 꽥꽥대고 내 잔소리 훈육은 효과가 0였다.
"너 X발 말고 또 무슨 욕 하는데."
"뭐가 욕인지 어떻게 알아 내가."
"니가 생각해도 엄마나 아빠한테 들어본 말이 아닌데, 언니 오빠들이 쓰면서 낄낄대는 말이 뭔지 한 번 생각해봐."
"아우~ 귀찮게 왜 자꾸 물어~"
"빨리 말해! 얼른!" (아...이때도 '빨리'는 말하지 말걸...)
딸은 뾰루퉁한 상태에서 생각을 하는가 싶더니
"지X한다?"
"그것도 욕이야. 쓰지 마."
"그건 무슨 뜻인데?"
" 간질이라는 병이 있어. 자기도 모르게 '발작'이란 게 일어나는데, 발작이란 게 자기 몸을 제어 못하는 거야. 쓰려져서 막 눈이 뒤집혀 흰자만 보이고, 입에서는 침이 거품처럼 하얗게 올라오고 온몸을 부르르 떠는 등. 그런 '발작하는 모습' 을 '지X'이라고 해."
"병X은?"
"병X이나 등X 둘 다 장애인을 비하하는 말들이야. 그것도 쓰지 마."
"개뿔은?'
"개뿔은 괜찮아. 멍멍 개한테 뿔이 없잖아. 뿔은 소나 사습 이런 애들한테만 있고. 그래서 실제론 존재하지 않는 거다, 란 의미니까. 뭐, 예를 들면 누가 뻥을 친다봐? 막 '우리 집에 금송아지 있다~' 하면서 없으면서 있다고 뻥을 치면, 그럴 때 '개뿔' 이려면 되는 거야"
딸은 욕의 의미들을 돌아보는 듯 했고, 그동안 자기가 쓰면서도 카타르시스와 약간의 죄책감 또한 느끼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그때, 아들이
"그렇게 뻥칠 때 또 쓸 수 있는 말이 있어요."
"뭔데?"
"개지느러미. 개한텐 뿔도 없지만 지느러미도 없어요."
'개지느러미'라니! 운전 중에 빵 터져서 사고가 나지 않을까 걱정되면서도 멈추지 않는 웃음을 계속 터뜨렸던 기억이 난다
'개지느러미'라니! 진짜 애들의 창의력이란!!!
진정되지 않는 웃음을 겨우 멈추며
"그래 희끅~ 개 큭큭큭 개지느ㄹ 꺌꺌꺌 개지느러미도 없지 킬키킥"
아이들 각자 학교에 데려다주고, 학원으로 출근하고, 그렇게 일주일을 또 정신없는 일주일을 보낸 뒤
다시 금요일 저녁,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차속에서 딸이 대뜸
"엄마 나 이제 욕 안해요."
"왠일로 스트레스가 싹~ 풀리신다며~ 욕하고 싶어서 어쩐대"
"X발 대신 '신발'이라고 하고요. '병X 등X' 대신 '천재! 천하의 재수 없는 X' 이라고 해요."
와. 30년 전에 나 국민학생 때도 천재는 천하의 재수없는 놈, 바보는 바다의 보배 뭐 이런 말도 안되는 말장난 했는데. 지금도 그러는구나!
"잘 하고 있네"
"누나. 개뿔 대신 개지느러미라고 써"
"개뿔은 욕이 아니거든! 바보야!"
"그래, 난 바다의 보물이야."
집에 와서 애들은 배고프다고 생라면을 먹겠다는 둥~ 과자 없냐는 둥~ 야식을 찾는다
생라면을 줄까 하다가 베란다 구석에 처박혀 있는 고구마들이 눈에 띄어 솔로 씻고, 길쭉하게 채썰었다. (껍질은 귀찮아서 못벗겼다.)
오븐을 200도로 예열시키고
커다란 비닐팩에 올리브유를 반 숟갈 정도만 넣고 고구마 채썬 것도 넣고 풍선처럼 비닐을 부풀려 쉐킷~shake it~
고구마에 올리브유가 골고루 묻혀지도록 흔든 뒤
오븐에서 10분~15분 굽는다.
그러면 겉바속초(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고구마스틱이 완성된다.
냉면그릇으로도 고봉으로 올라올만큼 잔뜩 고구마스틱을 만들어 놔도 8살, 7살 아이의 먹성은 우유와 함께 부스러기까지 핥아먹을 정도다.
딸, 나도 돌이켜보면 네 나이 때 욕을 하고 싶었던 것 같아. 그러면 내가 강해진 느낌이 들었거든. 하지만 나이가 먹어보니, 그 나쁜 말들을 해봤자 제일 잘 듣는 건 나 자신이더라고. 정말 강해지는 것도 없고 말야.
어른이 되고, 네 엄마가 되었음에도 욕이 나오는 순간이 있어. (사실 너 안듣는 데선 요즘도 한단다.)
하지만, 아까 말했듯, 욕을 하면 제일 정확히 먼저 듣는 사람은 바로 내 자신인걸,
운전하면서 앞이나 옆 운전자를 욕해봤자 그 사람들은 내 욕을 듣지도 못하는 걸,
이젠 잘 알기에.
욕을 할 필요가 없구나, 욕의 효용성이 없구나, 란 걸 알기에 이제 좀 참는단다
우리 딸이 이 엄마가 깨달은 걸 깨달으려면
좀 더 자라면서 망신도 당하고, 가슴 아픈 일도 겪고, 수치스러운 경험도 하는 등의 '경험'을 하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엄마로서 네가 되도록 저런 경험을 하지 않길 바라지만, 어쩔 수 없겠지?)
원래도 맛있는 고구마지만,
자르고, 굽고, 찌고, 익히면 더 맛있고 먹기도 편한 고구마스틱이 되듯
너도, 나도, 사람과 세상속에서 잘리고, 구워지고, 익혀지면서 훨씬 더 필요한 사람으로 성장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오늘 욕을 안하려고 노력이라도 하는 네 모습이 너무 멋져보였다.
네가 나보다 낫다!
마지막으로 엄마 대학 때 배웠던 시 한수 띄운다.
독나무
-윌리엄 블레이크(류시화 역)
나는 친구에게 화가 났지.
내 분노를 말했더니 분노가 사라졌지.
나는 적에게 화가 났지.
그것을 말하지 않았더니, 분노가 자라기 시작했지.
두려움 속에서 그것에 물을 주었지.
밤이나 낮이나 눈물로.
그리고 미소로 햇빛을 비춰주었지.
부드러운 위선과 가식으로.
그것은 밤낮으로 자라나
빛나는 사과 하나를 맺었지.
나의 적이 그 탐스러운 열매를 보고
그것이 내 것인 줄 알았지.
밤이 하늘을 가렸을 때
그는 내 정원으로 숨어들었지.
아침에 나는 기뻤지.
내 적이 나무 아래 쓰러져 있는 것을
시는 친구가 독이 든 열매를 먹고 쓰러진 것을 보며 기쁘다고 끝맺음을 짓지만(원래 이 시는 사회와 기독교를 비판한 것이기도 하지만 시인의 원래 뜻은 차치하고)
엄마는 시 속에서의 '나'가 너무 안타까웠단다.
독이든 열매가 열린 독나무는 바로 그 '나' 자신 아니겠어?
아마 친구를 쓰러뜨리고 기뻐하는 '나' 자체가 이미 독에 오염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욕이란 게 이런 거 같아. 상대방을 쓰러뜨릴 수도 있을지 몰라도, 이미 나 자신이 욕으로 오염되서 쓰러지는 것일 수도.
그러니까, 우리 욕은 "개뿔" 아니. "개지느러미"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