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치아 May 17. 2021

경계선에 서있는 나와 그대에게

어느 소속도 아니고,어느 쪽에서도환영받지 못하는.

영화 '그린북'은 '돈 셜리'라는 실존 인물에 대한 이야기이다.


1950-60년대 인종차별이 심하던 미국에서 흑인으로 태어났으나 고등교육을 받고 피아니스트로서 성공한 그는

특히나 인종차별이 심한 남부지역으로 리사이틀 여행을 떠나게 되었고,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의 백인, 보디가드 겸 운전자 "토니"와 동행하면서 서로 교감한다는 내용.

(그 덩치 크고 건들건들해 보이는 "토니"가 "반지의 제왕"시리즈 '아라곤'역을 맡은 배우라는 걸 알게 되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더티 섹시 아라곤 님이 어쩌다...)


닥터 셜리는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려 노력하지만

인종차별을 대놓고 하는 백인들에 의해서 연주장 내 화장실도 못 쓰고,

흑인들만 묵을 수 있는 여관과 술집에서는 '흑인답지 않다'는 이유로 배척당하고 폭행까지 당한다.

그리고 빗속에서 소리를 지른다.


"So if I'm not black enough and if I'm not white enough, then tell me Tony, what am I?"

충분히 흑인답지도, 충분히 백인 답지도 않다면, 그럼 난 뭐죠?





이안 감독은 대만에서 태어나 예술대학을 다니고는

미국으로 건너가 영화 공부를 했지만, 뉴욕대 졸업 후 서른이 넘어서까지 연출자로서 일을 못하자

다시 대만으로 와서 연출한 영화들이 모두 성공한다.

그는 내놓는 영화마다 호평을 받고 각종 영화제에서 상 또한 받는데,

영화 장르가 [음식남녀]와 같은 가족드라마

[센스 앤 센서빌리티], [브로크백 마운틴]와 같은 로맨스

[와호장룡]과 같은 무협

[살기 위해(To live on)]과 같은 서부영화

[베를린 일기]는 전쟁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같은 3D 기술을 적용한 드라마

[헐크] 같은 히어로물까지

매우 폭넓다. 이 정도면 그냥 영화 모든 장르를 다 씹어 드셨다고 해서 과언이 아니다.


이런 이안 감독은 스스로를 "동양인도 서양인도 아닌" 경계인으로서의 정체성으로 말한다.





위에 너무나 위대한 사람들 얘기로 내 누추한 삶을 비유하려는 것 같아 좀 민망하다.

그저 "경계인"의 심리적 소외감에 대해서 말하려 했는데 시작부터 밑밥이 너무 거창했다. 


인간은 사람이든 물건이든 쉽게 두 부류로 카테고리를 나누는 경향이 있다.

이쪽 아니면 저쪽.

내 편, 네 편.

우리, 그들.


학부모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학교 활동에 적극적이거나, 소극적이거나.

대부분은 학교 활동에 소극적인 학부모들이고, 대부분 직장인이거나 본업이 있어 바쁘시기 때문이다.

적극적인 분들은 가정주부이거나, 자영업을 하시면서 시간적 여유가 있는 분들이다.


나는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서도 학교 활동에 소극적인 사람으로서,

대다수인 '바빠서 학교 활동에 소극적인 학부모님들'과도 말 섞기 힘들고

수는 적지만 입김도 세고, 어디서나 빛이 나는 '학교 활동에 적극적인 학부모님들' 사이에서 또한 소외받는

경계인의 입장이다.


'돈 셜리 박사'의 말을 인용하지만

충분히 시간이 부족한 엄마도 아니면서 충분히 학교 일에 참여하지도 않는 엄마.


학부모회장님과 선생님이 전화로

"오후에 바쁘세요? 안 바쁘시면 교육발전협의회 회의도 참석하시고, 의원도 하시면 좋을 텐데..."

"도서관 사서 봉사와 녹색 어머니회 교통 봉사 인원이 부족한데 시간 좀 있으시죠?"

라며 돌려 돌려 말하지만 결국

'너 집에 있는 거 알고 학교 가까이에 사니까 빨리 나와'라는 말이다.

(그래도 안 나가다 교통봉사는 뜨문뜨문 하는 중이다.)


딸아이와 같은 반 학부모이며 고등학교 동기가 하나 있는데, 그 동기는 인근 고등학교 교사이다.

그 동기가 카톡으로 온라인 수업 관련해서 물어오며

긴급 돌봄으로 아이를 학교에 맡기더라도 개인 태블릿이나 폰, 이어폰까지 챙겨 와야 한다는 공문에 폰을 사줬는가에 대해 물어봐서

(작년에는 긴급 돌봄으로 학교 간 아이들은 학교 티브이로 다 같이 온라인 수업을 시청했었다. 녹화된 비디오만 보면 되었으니까.

하지만 올해부턴 쌍방향 수업 시간이 필수적으로 들어가며 개인 기기를 휴대해야만 하는 걸로 바뀌었다.)

나는 초1부터 학원 보내면서 아이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서 사줬다고 하니

"넌 시간도 많으면서 니가 애 가르치면 되지 뭘 학원을 보내고 폰을 벌써 사줬어?"

라는 흘려들어도 되는 말에 괜히 가슴이 콕콕 아팠다.


'경계인'들은 어디서든 환영받질 못한다.

소속이 없으니 날 비호해줄 아군도 없고,

충분히 '그들'같이 않아 '우리'가 되지 못하고, 소외된다.


문득 예전에 서울에서 살 때 극심한 소외감에 시달리고 있을 때 별 것 아닌 일로도 움츠러들었던 일 하나가 생각난다.

정동 인근을 지나는데 그날따라 시위가 있어서인지 거리에 사람이 없고

난 찾아가야 하는 건물을 못 찾아 같은 길을 빙빙 돌고 있을 때

(2000년대 중반엔 아직 스마트폰도 없고 당연히 구글맵도 못 켰다.)

문득 정신 차려보니 건물 뒤에 전경들이 경찰차에서 내려 잔뜩 쉬고 있고, 민간인은 나밖에 없었다.

그들이 내게 뭐라 하는 건 아니었지만 괜히 당혹스러워 그 길을 얼른 빠져나오니

마침 퇴근시간이라 건물에서 지하철 역 쪽으로 같은 방향으로 걷는 인파들 속에서

나 혼자만 건물 쪽으로 걷는 그 위화감.

외롭기까지 한 타인과의 '다름'. 


난 왜 여태까지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경계에서 엉거주춤 서 있으면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조차 혼란스러워할까.

43살까지 경계인으로 살았다면, 이젠 내 정체성은 이미 '경계인'으로서 확립된 것이 아닐까.

더 이상은 어디엔가 속하려고 꾸역꾸역 노력하는 걸 멈추고,

그저 나는 이럴 수밖에 없으니까.라고 힘껏 받아들이는 것이 낫지 않을까.

돈 셜리 박사나 이안 감독처럼 멋지게 성공한 경계인이 아니라

그저 소외받는 초라한 아줌마일 뿐일지라도,

그저 나는 내 삶을 살아갈 수밖에.

혹시 모르잖는가. 경계인으로서의 정체성으로 다양함을 끌어안은 저 위에 얘기한 두 분처럼

나 또한 다양한 삶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고 보다 겸허한 사람이 될 수 있는지도.


그래도 예전에 비해 나아진 것은

이제 외로움을 떨치기 위해 나를 잃어버리는 짓은 하지 않는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잘 하고 있어. 거 봐, 할 수 있잖아. 잘했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