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으로 쌓아 올린 수원 화성
한신대 김준혁 교수님과 수원 '화성행궁'을 재발견하다
화성행궁 및 성곽길을 탐방하였다.
비록 업무차 떠난 역사기행이지만, 정말 느낀 게 많았다. 오늘부로 정조대왕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휴머니스트 정조대왕
정조대왕은 후기 조선의 자유 평등 박애 사상을 이끌었던 유일한 왕이 아니었나 싶다. 노비제도를 혁파하려는 생각 자체는 왕권 강화를 위해 왕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었지만, 그 애민정신 자체를 몸소 행동으로 보여준 왕은 드물다.
당대 소위 엣헴~ 하는 영감들은 말을 타고 오르내릴 때 몸종을, 장군들은 부하를 엎드리게 하여 등을 밟고 오르내렸다고 한다.
연무대엘 가면, 어도(왕이 다니는 길) 끝 계단 앞에 큰 정방형의 돌이 놓여 있다. 나는 이 돌이 정조 휴머니즘을 보여주는 끝판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짐작하였겠지만, 정조는 그런 비인간적 행태를 타파하고자 그 돌을 밟고 오르내린 것이다. (물론 그 큰 돌을 만든 석공은 죽어났겠지만)
또한, 화성 축조공사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의 이름을 성에 새겨 넣도록 하였다. 심지어 축조 감독이던 정 3품 공사 책임자와 중간간부, 석수공인 기술자의 나란히 동일선상에 새겨놓게 지시하였다. 정 3품 벼슬아치와 석수공이 같은 섹션에 이름이 새겨질 수 있었던 것. 이 또한 범상치 않은 일이다. 정조는 결코 아랫사람이라 하대하여 막 부르지 않았다. 항상 이름이나 직위를 공손하게 불렀으며, 그 말씨는 나직하였다고 한다. 진정한 애민정신없이는 일국의 왕으로서 불가능한 일이다.
효성지극 정조대왕
정조는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진찬례(칠순잔치)를 화성행궁 내부의 봉수당에서 베풀었다. 이때, 홍씨의 내빈 25명을 전부 상석에 앉히고, 정조 자신은 그 아래에 위치하였다.
홍씨는 어머니이니 그렇다 치고, 절친한 친구들인 내빈들은 모두 여자였음에 그 정성이 더하다. 당시 여자를 왕인 자신보다 상석에 앉히기 쉽지 않았을 터. 어머니를 배려하고자 하는 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또한, 방화수류정의 그 수원천은 장헌세자(사도세자)가 당시 안장되어있던 화산의 바로 앞으로 물길이 이어진다고 한다. ‘방화수류’가 꽃을 쫒고 버드나무를 따라간다는 뜻으로 해석하기 쉽지만, 실은 사도세자를 수원천 따라 쫒고 싶은 마음이 가득 담긴 말이다. 꼭 정조는 수류정에만 가면 물길 따라 활시위를 당겼다고 한다. 왜 그러는지 알 것도 같다. 최대한 멀리멀리 쏘고 싶었겠지.
한국의 가우디, 정조대왕
이왕 화성을 짓는 김에 정조는 기존의 토성(흙으로 지은 성) 말고 완전히 탄탄한 석성(돌로 쌓은 성)을 짓고 싶었던 모양이다. 허나, 무게가 상당한 돌을 가져오려면 운송비가 만만찮은 사안. 기존에 있던 광악산(광교산)에서도 돌을 나르기엔 꽤나 거리가 있어, 기존의 토산으로 인식되던 팔달산을 조사하도록 지시하였다. 결국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석산임을 밝혀내었고, 캐내어진 어마어마한 토양 덕분에, 성곽 주변의 내탁(성곽까지 흙을 쌓아 올리는 방식)을 가능케 하였다.
또한, 축성 시, 돌과 돌 사이의 석회질을 바르는 방법도 남한산성 이래로 처음이다. 시멘트와 거의 유사하여 나는 ‘복원할 때 발랐나 보다’ 하는 생각이었는데 웬걸. 바로 1870년도식 회를 바르는 방식이란다.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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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수원에 거주하는 동안, 수십 번 들락거린 수원 화성이건만, 알고 탐방하는 것과 아닌 것은 이리도 다른 것이었던가. 오늘 봤던 수원 화성 곳곳에는 이산 정조대왕의 디테일이 곳곳에 묻어 있었다. 너무 길어서 하나하나 모두 열거하지는 못하겠지만, 옹벽, 옹성, 현판의 힘찬 글씨, 당시 평균 신장을 고려한 성벽의 짜임새 하나하나 디테일이 들어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꿈보다 해몽이라는 기가 막힌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김준혁 교수님의 명강 덕분이기도 하지만, 가슴 깊숙이까지 전달되는 성곽의 포근한 기분은 바로 정조대왕의 따스한 마음씨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