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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도시 어른동화] 헤맴 지도(1화)

“주문은 여러 번 바꾸셔도 됩니다. 잠시 깜박하셔도 괜찮습니다.”

by Alice in the Smart City

1화. 오늘의 값은 참새



한태수 어르신은 자꾸 메뉴를 바꿨다.
“된장찌개… 아니다, 제육볶음밥… 아니, 잡채.”


주방의 조리 로봇이 멈췄다. 화면에 붉은 경고가 떴다.

'주문 확정 대기 시간 초과'


식당 지점장 AI가 안내 멘트를 틀려는 순간, 구석에서 일하던 수빈이 손을 들었다.
“이 자리 오류 허용 구역으로 지정해주고, 경고 멘트 멈춰줘.”


수빈의 직업은 예전에 없던 새 일이다. 정식 명칭은 ‘인지 패턴 기록관’. 도시 곳곳에서 일어나는 망설임과 번복, 작은 실수를 기록하고 분석해 의료 AI와 복지 시스템에 돌려준다.


기계가 효율을 배운다면, 기록관은 비효율의 뜻을 배운다. 어떤 틀림은 그냥 실수지만, 어떤 틀림은 도움을 청하는 신호이자 사람 중심 스마트시티를 만드는 소중한 자원이다.


수빈이 이 식당에 배치된 건 우연이 아니다. 도시 데이터허브가 최근 이 지역에서 반복 주문, 경로 이탈, 약속 잊음 같은 초기 변화 신호가 늘고 있음을 감지했다. 그래서 이곳이 ‘오류 친화 공간’으로 선정됐다.


수빈은 현장 기록관이다. 그 ‘오류 친화 공간’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식당이다.


2045년의 스마트시티 판교에는 이상한 가게들이 동네마다 몇 군데씩 있다. 현금 대신 손님의 이야기로 값을 받거나 최종 주문까지 주문을 여러번 바꿔도 되는 찻집과 식당들.


이 식당의 문과 메뉴판에는 이렇게 크게 쓰여 있다.
“주문은 여러 번 바꾸셔도 됩니다 · 잠시 깜박하셔도 괜찮습니다.”


한태수 어르신은 근처 스마트 시니어 단지에 사는 단골 손님이다. 수빈과는 오늘이 세 번째 만남이다.


다섯 번째 주문 변경 뒤, 어르신은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표정은 약간 멍했고, 미안하다는 말은 없었다. 대신 테이블 나무결을 손끝으로 천천히 쓰다듬었다. 같은 동작이 몇 분째 이어졌다.


수빈의 단말기가 조용히 진동했다.
"초기 변화를 의심해 볼 만한 미세 신호."

단독으로는 단정할 수 없다. 다른 징후들과 함께 지켜봐야 한다. 수빈이 곁으로 가서 미소 지었다.

“어르신, 여기서는 주문 편하게 바꾸셔도 돼요. 대신 주문 마치시면 이야기 하나만 들려주세요. 오늘 여기 오는 길에 보셨거나 들으신 것, 한 가지만요.”


이것도 프로토콜의 일부다. 최근 기억을 자연스럽게 확인하는 방식. 한 어르신은 잠시 창밖을 보다가 말했다.

“횡단보도 소리가… 참새소리였지. 예전엔 뚜뚜뚜 했는데.”


좋은 신호였다. 방금의 경험을 구체적으로 떠올리고, 예전과 비교할 수 있다는 것.


수빈의 단말기엔 조용히 기록이 남는다.
‘공간 지남력 양호, 단기 기억 유지.’


스마트 횡단보도는 표준 신호음에 시간대별 자연음을 낮게 깐다. 아침엔 참새소리, 오후엔 빗방울, 밤엔 파도 소. 어르신과 아이들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서다.


수빈이 웃었다.
“좋네요. 그럼 오늘 메뉴는 참새 찌개로 할까요? 아니면 빗방울 잡채?”

어르신도 웃었다.
“참새 찌개라니, 별수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된장찌개. 어릴 적 엄마가 해 주던 맛으로. 두부는 큼직하게, 대파는 많이, 된장은 약간 단맛.”


조리 로봇의 화면이 푸른빛으로 바뀌었다. 가벼운 끓는 소리가 난다. 레시피 데이터베이스에 ‘어릴 적 된장찌개’는 없다. 대신 도시 데이터허브의 기억 기반 레시피 시뮬레이터가 작동한다. 한태수 어르신의 말에서 건진 힌트들을, 그가 자란 지역의 식습관과 제철 농산물 정보와 섞는다. 정확하진 않다. 다만, 가까워지려 애쓴다.



된장찌개가 나왔다. 어르신은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었다. 추억의 맛에 가까웠을까.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수빈은 테이블 위 단말기에 손가락을 얹고, “오늘의 오류 기록” 칸에 적었다.

‘주문 변경 5회. 사과 0회. 새소리 언급. 장기 기억(유년기) 선명. 반복 동작(손 쓰다듬기) 5분 지속. 엄마의 된장찌개 — 정서 기억 보존 양호.’


식사가 끝날 무렵, 어르신은 지갑을 찾는 듯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멈췄다. 수빈이 고개를 저었다.

“어르신, 여기서는 '이야기'가 계산이에요. 오늘의 값은 ‘참새’이니까 그에 관련된 이야기 들려주세요.”


어르신은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참새는… 혼자 밥 안 먹어. 늘 모여서 같이 먹지. 그러다 한두 마리는 멀찍이 서서 경계를 서. 내성적인데 책임감 강한 우리 형이 그랬어.”


수빈은 그 이야기를 도시의 데이터허브에 올렸다. 단순 기록이 아니다. 이야기의 구조, 문장의 이어짐, 시제의 정확성, 비유의 쓰임. 모두가 인지 건강의 단서다.


어르신의 이야기는 선명했다. 과거와 현재를 잘 가르고, 관찰과 감정을 고르게 섞는다. 아직은 괜찮다. 하지만 주문 번복과 반복 동작은 계속 지켜봐야 한다.


도시의 데이터허브에는 오차, 망설임, 반복, 번복 같은 레이블의 데이터가 쌓인다. 개인의 동의 아래 의학 모델을 고도화하는 데 쓰인다. 가게 문을 닫을 즈음이면 모니터에 그날의 '헤맴 지도'가 뜬다. 흔들린 기억의 방향, 망설임의 모양, 번복의 온도. 그 지도는 레시피나 수치보다, 먼저 사람 자체를 기억한다.


가게를 나서는 어르신 곁에서 수빈이 물었다.
“다음엔 무엇으로 헤매실 것 같으세요?”

어르신은 먼 곳을 바라보듯 말했다.
“음… 오늘과 내일 사이에 걸려 있는 거.”


수빈은 그말을 듣고 그날 한태수 어르신과의 만남에 대한 마지막 기록을 했다.
'[인간의 기록] 우리는 내 안의 ‘진짜 나’를 발견하기 위해, 헤매고 실수한다.'


지점장 AI는 그 옆에 작은 붉은 별을 찍고 표기했다.
'[기계의 기록] 초기 인지 저하 의심. 지속 관찰 권고. 비효율 고객.'


수빈이 미소를 지으며 지점장 AI에게 말했다.
“실수하고 헤매도 함께 해요. ‘비효율’ 딱지는 사람을 움츠리게 하지만, ‘밥을 다른 사람들과 섞여 같이 먹는다’는 건 그 반대예요. 그건 당신은 괜찮다는, 존엄의 승인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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