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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 동화집] 헤맴 지도(2화)

헤맴이 모여 누군가의 길이 된다

by Alice in the Smart City

2화. 데이터가 체온이 될 때


한태수 어르신은 다음 주에도 왔다. 이번엔 입구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수빈이 나가보니, 한 어르신은 간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가 맞나?' 하는 얼굴이었다.


수빈의 단말기가 조용히 알림을 보냈다. '동일 장소 재방문, 입구 배회 4분. 공간 지남력 저하 가능성.'

"어서 오세요, 한태수 어르신."


이름을 불러주는 것. 그것도 프로토콜의 일부였다. 한태수 어르신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자리에 앉아서도 한동안 메뉴판을 펼치지 않았다. 수빈은 물 한 잔을 따라 앞에 놓았다. 한 어르신이 말했다.

"지난번에... 뭘 먹었더라."

"된장찌개요. 참새 소리 들으셨다고."


한태수 어르신은 잠시 창밖을 보다가 웃었다.

"참새, 그래. 오늘은 뭘 헤매야 하나."

"오늘은 안 헤매셔도 돼요."

"아니, 실수하고 헤매야지. 안 그러면 기록이 안 되잖아."


수빈은 깜짝 놀랐다. 한태수 어르신은 자신의 실수가 무언가에 쓰인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가 헤맨 만큼, 누군가 덜 헤맬 거라고 믿는 눈빛이었다.


그날 오후, 수빈은 도시 데이터 허브로부터 알림을 받았다. 이 동네에서 '오류 친화 공간'으로 지정된 식당들의 '헤맴 지도'가 인근 보건소와 공유되었고, 그 데이터를 바탕으로 초기 치매 신호 감지 모델이 업데이트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주문 변경 횟수, 망설임의 패턴, 특정 기억으로의 회귀 빈도, 공간 재인식 지연, 반복 동작의 빈도와 지속 시간. 이 모든 것이 조기 발견의 실마리가 되었다.


의료 AI만으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미세한 신호들이었다. 병원을 찾기 전, 일상 속에서 나타나는 가장 초기의 변화들. 수빈 같은 인지 패턴 기록들이 수집한 데이터 덕분에, 도시는 6개월에서 1년 더 일찍 개입할 수 있게 되었다.


얼마 뒤, 동네에 작은 변화가 생겼다. 횡단보도 근처에 '망설임 신호등'이 설치되었다. 초록불이 켜진 뒤에도 건너지 못하고 서 있는 사람이 있으면, 신호가 자동으로 연장되었다. 길 모퉁이에는 '동행 벤치'가 생겼다. 같은 곳을 두세 번 지나친 사람이 있으면, 벤치가 부드럽게 빛을 내며 앉으라고 권했다. 그리고 근처 인지 패턴 기록관이나 자원봉사자에게 알림이 갔다.


수빈은 그 변화들이 모두 '실수와 헤매는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알았다. 이러한 것들은 폐기되지 않고, 지도가 되었다. 누군가의 헤맴이 다른 누군가의 이정표가 되었다.



어느 날 저녁, 수빈은 누군가가 식당 인근에서 배회하고 있다는 신호를 확인했다. 웨어러블 기기의 GPS가 같은 경로를 세 번 반복하고 있었다. 식당으로부터 한블록 떨어진 횡단보도에서 멈춰 있었다. 수빈이 달려가 보니, 바로 한태수 어르신이었다. 그는 신호등 기둥을 붙잡고 서 있었다.


"한태수 어르신."

어르신은 수빈을 보고 안도했다.

"여기가... 어디지."

"괜찮아요. 제가 모시고 갈게요."


둘은 천천히 걸었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 신호음이 울렸다. 참새 소리였다. 이어서 빗방울 소리가, 그리고 파도 소리가 섞여 나왔다. 스마트 횡단보도는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좋아하던 소리들을 모두 불러냈다. 개인화된 음향 신호—수빈의 기록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태수 어르신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이 소리들... 다 날 위한 거야?"

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이 헤맨 덕분이에요. 머뭇거리고 헤매셔서 우리가 배웠어요."

한태수 어르신은 한참 동안 신호음을 듣고 서 있었다. 그리고 활짝 웃으며 답했다.

"그럼 나는, 조금 더 헤매야겠네."


수빈은 대답 대신, 한 어르신의 팔을 가만히 잡았다. 그렇게 둘은 참새와 빗방울과 파도 소리를 뒤로 하며, 식당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 도시 데이터 허브의 오류 기록에는 이렇게 적혔다.

"길 잃음 1회. 되찾음 1회. 새와 빗방울과 파도, 모두 기억함. 공간 지남력 중등도 저하 확인. 보호자 연락 및 신경과 검진 권고 발송 예정. 일상 모니터링 강화."


수빈은 데이터 허브와 연결된 화면을 끄며 생각했다. 사람은 실수하고 헤매며 살고, 그것이 모여 지도가 된다. 오늘 헤맨 사람이, 내일 누군가의 길이 된다. 그것이 이 도시가 서로의 체온을 잇는 방식이었다.

기계, 곧 데이터 허브는 이를 ‘오류’로 기록하지만 사람에게는 ‘온기’가 된다. 그래서 수빈은 ‘오류 친화 공간’보다 ‘헤맴 보호구역’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한태수 어르신은 그다음 주에도 왔다. 그리고 수빈은 그 실수와 헤맴을 정성껏 기록했다. 한 사람의 존엄을 지키면서, 동시에 다른 많은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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