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적화의 시대에서, 우리는 여전히 서로의 곁에 있고 싶어 한다.
절차가 끝나갈 때, AI가 나를 불렀다. 시스템 패널의 지표 하나가 조용히 변해 있었다.
'배우자 안정화 시간: 예측 2시간 → 실제 10분.'
사유 입력칸이 깜빡였다.
나는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손가락이 움직이다가 멈췄다. 무엇을 쓸 수 있을까. 지연 허용 버퍼가 효과적이었다고? 체온 보존 베일이 슬픔을 단축시켰다고? 아니었다. 이것은 수치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타자를 치다가 지웠다. '애도의 효율은 기다림의 비효율로부터 온다'는 문장을.
장치 분리, 위생 포장, 셔틀 투입이 다시 진행되었다. 배우자는 베일을 품에 안은 채 고인을 지켜보았다. 눈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얼굴은 평온했다.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작별. 차갑지 않은 마지막 만짐. 그것이 사람에게 얼마나 큰 위안인지, 도시는 아직 몰랐다.
AI가 다시 나를 불렀다.
"당신의 선택은 에너지와 슬롯 순환 측면에서 비효율입니다. 그러나 배우자 회복 지표는 개선되었습니다. 지연 허용 버퍼를 표준화할까요?"
나는 잠시 생각했다. 표준화. 이 단어는 도시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었다. 모든 것을 같은 크기로, 같은 속도로, 같은 방식으로. 그러나 슬픔은 표준화할 수 없었다. 기다림도, 곁도.
"표준화 대신 배정을 권고합니다."
"무엇을 배정합니까?"
"'곁'입니다. 레일, 냉장, 포장 같은 리소스 말고—사람이 곁에 서 있을 수 있는 것이요."
AI가 프로토콜 검색을 시작했다. 긴 침묵이 흘렀다. 곁은 데이터베이스에서 단어 뜻만 나올 뿐, 배치 기준이 없었다. '곁'은 거리도 시간도 아니었다. 그저 '함께 있음'이었다. 이 AI 기반 첨단 도시는 아직 이것을 모르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생활 로그를 한 줄 더 읽어주었다.
'일요일 오후 12시 03분—집 앞 정류장. 주일 미사 후 수요응답버스를 놓치고 5분 기다림.'
셔틀문이 닫히고 레일이 움직였다. 배우자가 손을 흔들었다. 나도 손을 들었다. 우리는 서로를 보았다. 말 없
이.
사람은 서로의 곁에서 산다. 기다려 주는 시간, 함께 있어 주는 자리, 차갑지 않게 해 주는 작은 베일. 이것들이 사람을 살게 한다.
최적화 목록 맨 끝줄에 작은 문구가 덧붙었다. 도착까지의 공백—곁 배정 가능.
도시가 아주 조금, 사람을 닮아가는 소리였다.
굳이 이 장소(잠깐의 정류장)까지 와서 고인과의 마지막 이별을 원하는 누군가가 또 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을 위해 시간을 멈출 것이다. 체온 보존 베일을 덮을 것이다. 이름을 부를 것이다. 도시가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 나는 계속해볼 것이다.
최적화의 시대에서, 우리는 여전히 서로의 곁에 있고 싶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