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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리스 Jan 06. 2022

흑백으로 돌아온 ‘기생충’

우리사회 숨겨진 계급의 경계 허물까


각종 영화 시상식에서 상을 휩쓸고 있는 ‘기생충’이 조만간 흑백영화 버전으로 국내에서 재개봉된다. 앞서 봉준호 감독은 영화 ‘마더’(2009)도 흑백영화로 만들어 선보인 바 있다. ‘설국열차’(2013)로 봉 감독과 합을 맞추던 홍경표 촬영감독의 아이디어였다. “설국열차 촬영 중 어둠의 콘트라스트가 구현하고자 했던 빛의 느낌이 마더의 흑백 버전으로 더 잘 살겠다는 생각이 들어 재작업하게 됐습니다.(과거 인터뷰에서)” 그는 이번 ‘흑백판 기생충’ 작업에도 참여했다.


흑과 백 특유의 감수성을 영화에 담으려는 시도는 종종 있었다. 거기에는 비용 문제도 숨어 있다. 그러나 기생충은 ‘굳이’ 흑백판을 따로 낸다는 점에서 영화 ‘동주’(2016)와는 결이 다르다. 동주를 연출한 이준익 감독은 “쥐꼬리만 한 예산 속에서 컬러 촬영의 한계에 맞닥뜨린 바람에 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털어놓았다. 반면 봉 감독은 애초 컬러판으로 찍은 것을 시간과 돈을 들여 다시 흑백판으로 만들었다.


흑백판 제작 이유를 영화적 유희의 일환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인터뷰 때마다 김기영의 ‘하녀’(1960)를 언급하며 ‘광팬’임을 자처하는 봉 감독에게 흑백 작업이 일종의 추억여행, 혹은 오마주 성격 아니냐는 것이다. 일부 언론에서는 “봉준호와 홍경표 둘 다 평소 고전 흑백영화에 대한 로망을 가졌기 때문”으로 보기도 한다.


물론 이런 접근이 일반적이지만 봉 감독이 스스로를 ‘사회학도’라고 소개하며 그 특유의 시각을 최근 내놓은 작품들을 통해 매우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흑백 작업은 또 다른 사회학적 시도일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계급을 가르는 ‘취향’을 마구 뒤섞어 경계를 없애버리는 의외의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생충이 폭로한 ‘계급사회’


전근대와 구분되는 근대 시민사회의 핵심은 신분제, 즉 ‘계급’의 종말이다. 우리 사회만 보더라도 근대화를 겪으면서 조선시대처럼 태어나자마자 양반, 혹은 태어나자마자 백정인 경우는 사라졌다. ‘모든 시민은 평등하고 동일한 권리를 가진다’는 대원칙이 모든 근대국가의 밑동에 자리 잡고 있다. 계급은 더 이상 없다. 적어도 ‘공식적’으론. 기생충은 바로 이 지점에 물음을 던진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기생충이 폭로한 건 우리 사회가 여전히 계급 질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이다. ‘기생충’이란 제목에서 볼 수 있듯 영화는 온통 계급적 은유로 가득차 있다. 반복되는 상승과 하강, 수직의 시퀀스들은 직설적이다 못해 노골적이다. 결과적으로 이는 우리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 영화가 전 세계적인 감응을 이끌어낸 것은 ‘새로운 신분질서의 등장’이란 자본주의 사회의 오랜 약점을 거침없이 쑤셔댔기 때문이다.


부르디외


과거 마르크스는 생산수단(자본)의 소유 여부로 계급을 둘로 나눴으나, 주변을 둘러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예컨대 땅투기로 큰 돈을 벌었다 한들 누가 계급적 우위를 인정해주겠느냐는 것이다. 돈만 앞세워 젠체하다간 외려 ‘졸부’ 소리만 들을 뿐이다. 그래서 계급의 핵심에 ‘취향’이 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1930∼2002)의 통찰은 쉽게 말해 계급제가 공식적으론 사라졌으나 문화의 소비, 예술에 대한 취향에 따라 지금도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취향’에 따라 ‘계급’이 갈리는 셈이다. 그에 따르면 교육은 그 구분선을 더욱 뚜렷하게 만드는 도구로 작용한다.


영화에서 기택(송강호)네와 박 사장(이선균)네의 접점도 아이들의 ‘교육’이었다. 박 사장네 아이들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일반인들은 상상도 못할 고액의 예술 과외를 받는다. 기택네 아이들이 피자박스 수천개를 접어야 겨우 받을 수 있는 돈이 한두 시간 수업의 대가로 오간다. 부르디외가 설명하는, 현대사회에서 계급이 재생산되는 방식 그대로다.



‘누가’ 흑백영화를 보는가


민중계급과 상류계급은 영화를 소비하는 취향도 당연히 구분된다. 이를테면 민중계급일수록 시원시원하고 직관적인 액션영화를 선호하는 반면 상류계급은 관념적이고 모호한 예술영화를 선호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이다. 일단 취향으로 계급이 갈린다는 부르디외의 시각을 인정한다면, 지금 등장하는 흑백영화들은 은연 중 상류층을 향해 있다고 볼 수 있다. 흑백영화 감독들 인터뷰를 보면 짜기라도 한 듯 ‘예술성’을 입모아 강조하고 있다. 흑과 백이 만드는 무채색의 단조로움, 고요한 정서를 하나의 문화적 취향으로 소비하려면 아무래도 높은 수준의 예술 교육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애시당초 흥미나 관심조차 갖기가 쉽지 않다.


최근의 흑백영화 중 그나마 인기몰이를 한 ‘동주’(누적 관객 117만명)나 ‘항거:유관순 이야기’(115만명) 등은 높은 화제성에도 흥행면에선 그리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자극적이고 화려한 영상에 익숙한 민중계급에게 단조롭고 왠지 어려워보이는 흑백영화는 뚜렷한 동기 없이는 다가가기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취향’의 구분선을 일거에 허물었다는 점에서 ‘기생충’은 대단한 영화다. 전 세계 최고 평론가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음과 동시에 ‘1000만 관객’까지 사로잡았다. 민중계급과 상류계급, 어느 쪽에 가까운가에 따라 영화를 보고 느낀 바는 서로 달랐겠으나 계급을 초월한 호평이 잇따랐다. 적어도 ‘기생충’ 아래 계급은 없었던 셈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흑백영화(예술)의 묘미를 깨닫게 함’을 성공으로 본다면, ‘흑백판 기생충’은 과연 성공을 거둘 수 있을까. 흑백판의 성공에 주목해야하는 까닭은 이것이 사실상 영화 관람이라는 일상적인 문화 소비행위에서마저 묻어나는, 우리 사회 숨겨진 계급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흑백판의 흥행성적은 그 경계가 점점 어그러지고 있다는, 어떤 사회적 신호로 해석될 수 있다. 즉, ‘예술’의 상류계급 독점이 깨지는 일인 셈이다.


계급의 붕괴와 전복은 영화 속 기택이 시도했다가 실패했던 것처럼 ‘폭력’이 아니라, 이처럼 문화의 지평을 넓히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이번 리메이크를 단순히 세계적인 성공에 취한 봉 감독의 추억여행이나 영화사의 마케팅 전략, 혹은 통상적인 디렉터스 컷쯤으로 봐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2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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