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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리스 Jan 06. 2022

세탁기

그곳에 가고 싶다. 밤잠 설치게 하는 무기력감과 시름시름 앓게 하는 실존의 상처가 깊어진 요즘엔 더욱 그렇다. 육식의 정점이었던 그때의 기억은 무척 달콤하다. 그렇다. 그곳에서 나는 먹이사슬 최상위 포식자였다. 머리 위에 무거운 작대기 네 개를 달고 말이다.


나는 연천에서 군복무를 했다. 몹시 추운 곳이었다. 산골짜기에 덩그러니 있는 부대였는데, 수색대대가 으레 그렇듯 군기가 몹시 셌고 모두가 이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물론 처음부터 육식이었던 것은 아니다. 아니, 초식동물도 되지 못했다. 그곳의 모든 구성원들은 단세포 생물에서부터 한 단계 한 단계 천천히 ‘진화’의 과정을 몸소 겪게 된다. 하지만 그곳에서 나는, 고등생물을 향한 세포분열이 지독히도 더뎠다.


영하 10도. 날이 왜이렇게 따뜻해졌냐며 사진을 찍었다.

막내 생활은 길었다. 소위 '군번줄이 꼬였던' 탓에 일병이 한참 꺾이고 나서야 첫 후임을 받았다. 겨울에는 특히 더 힘들었다. 영하 20도는 우습게 넘기는 매서운 추위 속에서 찬물로 벌겋게 달궈진 손으로 매일 같이 수십 개의 걸레를 빨아야 했다. 그게 단세포 시절 주어진 나의 임무였다.


거기에 세탁기가 있었다. 그렇게 맨손으로 걸레를 빨고 있으면 옆에선 세탁기가 덜컹덜컹 돌아간다. 이등병 시절, 너무나도 간절했던 선망의 대상이었다. 아무나 쓸 수 없었다. 100명이 넘는 부대에 단 3대뿐이니 그럴 만도 했다. 손을 후후 불어가며 걸레를 빨고 있으면 고참들은 쓰레빠를 질질 끌고 와 세탁기를 돌렸다. "여, 고생 많다." 웃으며 어깨를 치는 그들의 말에 나는 그저 어색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곳은 한 공간이었지만, 철저히 분절된 두 공간이기도 했다.


처음 세탁기를 돌렸을 때가 기억이 난다. 상병 2호봉이 됐을 때, 선임들 눈치를 보며 세탁기 앞에 섰다. 보이지 않게 나를 짓누르던 어떤 압력들을 막 이겨낸 참이었다. 얼마 간의 세제를 넣고 뚜껑을 닫고 버튼을 눌렀다. 그때 느낀 자존의 충만이란. 존재의 기쁨이란. 그것은 인내하고 침묵했던 지난날의 달콤한 보상이었다. 그렇게 내 어깨에는 보이지 않는 날개가 생겼다. 목 뒤가 빳빳해졌고, 눈빛은 매서워졌으며, 날카로운 이빨이 돋아났다. 바야흐로 육식동물로의 진화였다.


나는 부조리를 많이, 아니 거의 대부분 없앴다. 이등병 때 설움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 하나, 그 세탁기만은 안 됐다. 그것은 곧 계급이었고, 권력이었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은 소비와 물질의 소유에 따라 갈린다. 과시적 소비, 물질의 소유는 타인과 나의 비대칭적 위치성을 환기시키는 유용한 도구다. 춥고 어두웠던 그곳에서, 세탁기는 ‘열등한’ 무엇들을 가려냈다. 그곳에서 나는 우월한 존재였다. 물론 그 과정은 '군기강 유지' 따위의 이데올로기로 손쉽게 세탁되곤 했다.


그때의 경험 때문일까. 각박한 삶에 입안이 씁쓸해지는 요즘 그때의 달콤함이 불현듯 떠오른다. 초식동물들 위에 군림하던 권력의 달콤함, 남들을 내려다보는 데서 오는 은밀한 쾌감이 내 무의식 저변에 뿌리내려져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아니,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 달콤함은 사실 구조의 폭력과 부조리를 묵인하고 복종한 보상이었다는 사실을. 정교한 시간 계획이라면, 누군가 조금의 불편함을 감수했더라면, 분명 세탁기는 다함께 쓸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했다. 초식동물들에겐 용기가 없었고, 육식동물들에겐 당위가 없었기 때문이다.



요즘 밤잠을 설친다. 더위와 추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마음이 답답해서 그렇다. 우리 세대가 맞닥뜨리고 있는 거대한 모순, 구조의 폭력은 차치하고 솔직히 말해 내 앞가림이나 먼저 좀 잘 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들 때, 자존의 균열은 점점 더 깊어진다. 어깨를 만져본다. 거기에 돋았던 날개는 어느새 없어졌고 이빨은 도로 뭉툭해졌다. 매일 같이 퇴화 중이다. 그런데 둘러보면 비단 나만의 일은 아닌 것 같다. 우리는 왜, 매일 이 지독한 자조와 퇴행적 자기검열로 뒤척이는 걸까.


어쩌면 그것은 무의식 저변에 숨겨져 있는 세탁기의 기억 때문일지도 모른다. 부조리와 불합리에 침묵한 대가로 받았던 '그것' 말이다. 뼈에 아로새겨진 외면과 순응, 군림의 기억들이 부지불식간 나, 그리고 동시대의 우리 안에서 소리 없이 작동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제는, 그마저도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확신이 든다. 내가 앞으로 마주할 현실에 그런 달콤함이 존재할까? 그런 보상이 존재할까? 그래도 그곳에서는 '시간'이라는 사다리를 밟으면 누구랄 것 없이 모두 진화할 수 있었지만, 현실에선 그런 사다리를 찾아보기조차 어렵다. 아, 물론 아주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 "군기강 유지" 등 그 당시 내가 누군가를 내려다보며 종종 써먹던 말들은 사회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노오오오력이 부족해!" 따위의 말로 조금 바뀌어 있지만 말이다. 20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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