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신성(Super nova). 초신성은 별이 소멸하면서 생겨난 엄청난 에너지 폭발로 평소보다 수 만 배 밝아지는 현상이다. 육안으로 뚜렷이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16세기 이전 중세 유럽의 어느 기록에서도 초신성에 대한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같은 시기 중국의 기록에 꼼꼼하게 적혀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는 중세 유럽을 지배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 때문이다. ‘우주는 완벽하고 완전하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카톨릭의 완전한 신에 대한 믿음과 맞물려 대중의 모든 세계관을 지배했다. ‘완전한 하늘’이라는 진리에 대한 믿음이 실제 현상을 외면하게 하거나 인식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사실’은 일어난 현상에 대한 인식이라는 의미에서 인식의 영역이다. ‘진실’은 거짓되지 않은 참이라는 의미에서 진리의 영역이다. 인간이 거짓과 참을 완전하게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주장과 같다. 중세의 세계관은 신을 매개로 인간이 진실을 깨달을 수 있음을 강조했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성경에 근거해 해석했다. 그러나 연역의 최초 고리인 신의 영역에 대한 의심과 반론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천체에 관한 모든 이상 현상은 사실로서 기록되지 못한 것이다. ‘신의 섭리’라는 일방적 진실은 왜곡된 사실을 창조했다.
베이컨을 비롯한 흄 등의 근대 경험주의자들은 중세의 연역적 인식론에 반기를 들었다. 성경이라는 도그마로 현상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경험적으로 입증된 사실들로 보편 법칙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이 주장한 귀납적 인식론은 교회의 권위에서 인간을 해방시켰고, ‘과학혁명’이라 불리는 폭발적 지식의 성장을 가져왔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귀납적 연구 방법은 권위를 위한 필수 요소다. 어떤 학문에서도 과학적 관찰과 실험이 전제되지 않으면 권위를 인정받기 힘들다. 그러나 관찰된 사실들로 진실을 유추하는 귀납적 방식은 본질적으로 한계가 있다. 흔히 쓰는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다’라는 말에는 ‘해는 동쪽에서 뜨는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매일 관찰되는 사실이 진실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나 1926년, 인류 최초로 북극점에 도달한 로알 아문센에게 태양의 여명은, 남쪽에서 시작됐다. 경험적으로 반복되어 객관성이 확보된 사실이라 하더라도, 진실의 모든 영역을 보장할 수는 없다.
연역적으로도, 귀납적으로도 진실의 영역은 쉽게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정치적 이해관계, 기득권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만들어진 ‘진실’이 너무나 태연하게 유통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낙수효과’가 있다. 8-90년대 미국과 영국을 시작으로 세계적으로 퍼진 낙수효과는 자본가와 기업에 대한 감세와 규제완화, 노동유연성이 결국 사회 모든 부의 재분배를 가능케 할 것임을 주장했다. 당시 이 논리는 수많은 수치와 통계로 만들어진 사실들과 유명 경제학자들의 권위에 근거해 합리화됐다. 그러나 오지 않은 미래를 담보로 자행한 이 정치적 실험은 범지구적인 양극화를 가속화하는 주된 원인이 되었다. IMF조차 최근 보고서에서 낙수효과가 유효하지 않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기득권의 입맛으로 재단된 사실이 만들어낸 왜곡된 진실이다.
물론 완전한 진실에 대한 인간의 의지가 인류 문명의 원동력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진실의 근거로써 사실의 영역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얼마든지 재단되거나 잘려나갈 수 있다. 설령 그 사실이 반복된 관찰과 경험으로 객관성을 얻었다 하더라도 진실의 모든 부분을 담보해주지는 못한다. 비판적 합리주의로 대표되는 과학 철학자 칼 포퍼는 일생동안 진실의 영역이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지배되는 것을 경계해야함을 주장했다. 진리의 획득을 주장하는 지적 오만을 경계하며, 진실의 가면을 뒤집어 쓴 허위의 본질을 꿰뚫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태도는 무비판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진실들에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는 것이다. 인간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고 권위와 과학으로 합리화된 진실에 반기를 드는 것이야 말로 ‘진실’을 향해 다가가는 첫걸음이다. 201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