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서강대에 갔다. 신촌에 일이 있으면 종종 서강대 도서관에 간다. 건물이며 학생들이며 대학 특유의 분위기가 감돈다. 특히 도서관의 느낌은 대학마다 다르다. 로욜라 도서관의 첫 느낌은 실팍했다. 크지는 않았지만, 속이 꽉 들어찬 느낌이었다. 높지 않은 천장에 철제 책장이 길게 늘어서 있고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착각일 수 있지만)무엇보다 학구적인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그렇다. 나는 그곳에서 그들을 엿보았다. 일종의 관음 비슷한 것일 테다. 도서관에 학생들은 얼마나 있는지, 시설들은 어떤지, 어떤 책들이 꽂혀 있는지 끊임없이 비교했다. 물론 기준은 우리학교다. 대학서열 따위 개나 주라는 주의지만, 사람들의 입에 비슷한 수준으로 오르내리기 때문에 더 관심이 갔을 지도 모르겠다. 어떤 부분에서는 우리학교 손을 들어줬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서강대가 훨씬 나았다.
어느 철학자의 말을 빌리면 누구나 어느 정도 관음의 욕구를 가지고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은 타인을 훔쳐보는데 익숙해져 있다. 타인의 삶을 슬그머니 엿보면서 자신의 삶을 재단하는 것이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SNS는 개인의 엿보기 욕구에 기름을 붓는다. 타인을 엿보고, 또 엿보임 당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본질일 수 있다. 자아의 형성은 언제나 타자와의 만남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러니 사람들은 끊임없는 비교를 통해 자아를 구획하고 스스로를 다듬는 일에 익숙할 수밖에 없다. 그 수단 중 하나가 ‘엿보기’다. 법의 경계를 줄타기하지 않는 한 엿보기는 그래서 옳다.
로욜라 도서관에서 내려오는 길에 대자보 하나를 보았다. 무심코 보니 교수들이 쓴 성명서 비슷한 것이었다. 내용인 즉 24년 만에 무죄 판결난 강기훈 유서대필사건에 연관된 박홍 총장의 사과와 반성을 촉구하는 글이었다. 그 옆으로는 재학생들의 대자보가 줄줄이 이어져 있었다. 그곳에서 가장 놀랐던 것이 바로 이 점이다. 그곳에는 아직 ‘꿈틀거림’이 있었다. 그들은 대학의 장(場)에서 자취를 감춘 지 오래인 그것을 노래하고 있었다. 입에 올리기도 간지럽다. 그것, 민주주의 말이다.
2년 전쯤 처음 서강대에 갔을 때 몇몇 학생들이 상복을 입고 장례식을 치르고 있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장례식’이란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죽었다며 울며 절규하는 그들을 나는 조소했다. 그저 가소롭게 보였다. 일종의 쇼거나 지식인 특유의 자기만족, 허영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최첨단을 달리는 21세기에 민주주의를 노래하다니. 그런데 한해 두해 지나고, 일련의 사건 뒤에 드러난 대한민국의 민낯은, 그리고 한국 민주주의의 민낯은 그야말로 참담한 수준이었다. 내가 비웃은 그들은 나보다 2년의 시간을 앞당겨 살았던 것이다.
물론 그곳의 모두가 민주주의를 외친 것은 아닐 것이다. 분명 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대다수가 냉소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어쨌거나 그들은 미약할지라도 그 소리를 이어 온 것이다. 오늘날 귀 기울이지 않으면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것. 이제는 입에 올리기도 민망해지는 그것. 지난날 대학을 ‘지성의 요람’으로 칭송케 했던 그것 말이다. 대자보를 보면서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한마디로 그 ‘꿈틀거림’이 부러웠다. "취업사관학교"라며 대학들의 위상이 전방위로 조롱당하는 요즘이라 더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학교에서 학생들의 대자보를 본 기억이 언제였던가. 가물가물하다. 몇 년 전 ‘안녕들하냐’는 누군가의 안부인사에 들불처럼 확 들고 일어난 이후로 학교에서 대자보는 종적을 감췄다. 물론 공간의 문제도 있다. 학생들의 문제의식들을, 담론들을 나눌 현실적 공간이 없는 것도 문제다. 그러나 전체학생대표자회의를 비롯해 학생 자치활동들은 매번 정족수 미달이다. 이제는 회의 개최가 학보 1면에 난다. 캠퍼스에 민주주의를 좇는 소리가 사라졌다. 그 자리를 취업난이 만들어낸 곡소리가, 신음소리들이 채운다. 물론 나 역시 죄인이다. 죄목은 불경죄다. 민주주의고 나발이고 취업만 되기를, 학점만 잘 받기를 소망했으니. 죄를 한아름 떠안고 있다.
사르트르는 존재의 근거를 제공해주는 신의 부재를 가정하면서, 실존의 근거는 타자의 시선에 포착된 나의 모습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즉, 타인이 보는 내 모습이 곧 내 존재의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아마 내가 그들을 몰래 훔쳐보았던 것처럼 지금도 누군가 나를, 그리고 우리를 엿보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들의 망막에 비친 '우리'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그들이 엿보았던 '우리'는 과연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혹 그것이 기계의 얼굴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누구의 탓도 아니지만 동시에 모두가 책임져야할 일임에 분명하다. 201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