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앞 왕복 8차로 사거리 횡단보도를 건너는 건 실로 진땀 나는 일이었다. 거듭된 실험 끝에 횡단보도 시작점에서 파란불로 바뀌자마자 발을 떼어야 반대편에 가까스로, 혹은 1∼2초 늦게 도착할 수 있단 걸 알게 됐다. 얼마 전 무릎 십자인대가 파열되고 횡단보도를 마주하는 내 머릿속엔 그날의 걸음걸이 속도와 무릎 통증, 신호대기 중인 차량 수가 어지럽게 뒤섞인 계산식이 세워지곤 했다.
계산은 대체로 성공했지만 때로 실패하기도 했다. 거리의 모든 눈동자가 온통 내 발걸음에 쏠리는 상황은 몹시 불편하고 초조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의 일방적인 우려와 달리, 그로 인한 위협이나 불편한 상황은 단 한 번도 발생하지 않았다. 아마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무쇠 보조기를 무릎에 달고 절뚝이는 모습 때문이었으리라. 차주들은 클랙슨 한 번 없이 넉넉한 기다림을 보여줬고, 외려 ‘천천히 가라’는 듯 손짓과 미소를 보냈다.
평생 크게 다쳐본 일 없는, 건장한 삶을 살아온 나로서는 대단히 신기한 경험이었다. 아무리 “괜찮다, 괜찮다” 마다해도 사람들은 나를 기어이 버스와 지하철 좌석에 앉혔고, 계단에 오르거나 엘리베이터를 탈 때, 빌딩 문을 열고 닫을 땐 꼭 “괜찮으시냐”며 한두 마디 건넸다.
‘아니, 사람들이 원래부터 이랬나’ 생각이 든 것도 잠시, 친절과 배려엔 ‘조건’이 붙는다는 사실을 이내 깨닫고 말았다. 무릎 보조기를 차지 않고 나갔을 때 사람들은 놀라울 정도로 내게 무관심했고, 시큰둥했다. 통증의 크기는 같았고, 다리도 절뚝였으나 그전까지 좀처럼 듣지 못한 클랙슨 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 대중교통을 탈 때면 지겹도록 듣던 “여기에 앉으라”, “어쩌다 다쳤느냐” 소리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사람들의 배려는 선택적이었고, 그 경계는 꽤 명확했다.
서운하단 생각보다 씁쓸하단 생각이 먼저 들었다. 배려심 가득했던 사람들의 달라진 태도는 결국 타인을 보다 세심히 살펴볼 여력이 모두에게 별로 없다는, 매우 당연한 사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배려는 타인에 대한 관심이고 타인에 관심 갖는 일은 생각 이상으로 큰 에너지 소모를 요구한다. 선택적 배려는 거꾸로 우리네 현실이 얼마나 고단하고 기진맥진한 것인지를 설명해준다.
남 뭐라할 것이 없는 게, 나 역시 늘 그랬다. 나는 내가 배려심 넘치고 친절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나의 배려는 언제나 선택적이었고, 또 차별적이었다. 상대방이 장애인이나 노인, 임산부가 아니라면, 배려와 친절이 무조건적으로 필요한 어떤 상황이 아니라면 나는 대체로 타인에 무관심하고 무표정했으며 무뚝뚝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얄궂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혹시 이런 이중적인 모습이 아이러니하게도 배려심의 발로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평소 타인에 무관심한 건 관심과 배려가 꼭 필요한 상황에 쓸 에너지를 조금이라도 남겨놓으려는, 무의식적 태도가 아닐까 하고 말이다. 말하자면 지치고 소진된 사람들의 배려법인 셈이다. 보조기를 찬 나에게 돌아온 따뜻한 배려들은 어쩌면 그렇게 꾹꾹 누르고 아껴 만들어진 것들일지 모른다. 빵빵 거리는 클랙슨 소리가 어쩐지 더 서글프게 들린다. 2020.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