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 두 달 정도 압구정의 한 사설 카지노에서 일을 했다. 용돈이 필요해서였다. 거기에는 잘 차려입은 중후한 중년 신사부터 몸을 반쯤 드러낸 요염한 옷차림의 젊은 여성까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들락날락했다. 한국말이 어눌한 유학생도 많았다. 가지각색이었지만 도박장에 오는 사람들에겐 두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돈을 잃을 것을 예상하고 오는 사람은 없다는 것. 그러나 대부분은 돈을 잃고 나간다는 것. 나갈 때 울상이 될지라도 들어설 때만큼은 발걸음이 경쾌했다. 22일 오전 서울 강동구 천호동에 있는 한 화상경마장에서 만난 김 사장도 마찬가지였다.
안으로 들어서니 익숙한 듯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사람들은 고속터미널 대합실에서 초점 없는 눈으로 TV를 보는 여행자 같기도 했고, 매서운 눈으로 증시판을 훑는 애널리스트들 같기도 했다. 다들 한 손에 경마 잡지를 쥐고 열심히 무엇인가를 적어댔다. 강남에서 사무실을 하고 있다는 김 사장은 어리바리해 하는 내가 불쌍했는지 “젊은 친구가 경마는 왜…”라는 가벼운 충고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경마를 하려면 일단 대가리(처음으로 들어오는 말)를 잡아야 된다고. 그리고 붙여먹기(확률이 높은 말 몇 마리를 추가하는 것) 해야지. 그러려면 분석을 해야 돼. 근데 분석이란 게 별게 없어. 어떤 놈은 배당 보고하기도 하고, 어떤 놈은 컴퓨터 들고와서 통계로 찍어. 꿈 한번 꿨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호로 찍는 놈도 있어.”
시간이 흐르자 하나둘 좌석이 차기 시작했다. 나를 옆에 앉히고 이것저것 알려주던 그는 익숙한 얼굴들이 보이는 듯 연신 반갑게 인사를 했다. 물어보니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아는, 매주 보는 그런 사람들이라고 했다. 서서히 장내의 공기가 달아올랐다.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경마가 시작되려 한다는 걸 직감했다. 500~600명 좌석이 7개 층으로 총 4300명 정원인 건물이 들썩거렸다. 구매권 창구에서 돈을 구매권으로 바꾸고 다시 개인들이 기계를 이용해 마권을 사는 식이었는데, 구매권 창구에는 묵직한 돈 다발이 계속해서 오갔다. 어림보아도 개당 수백은 돼 보이는 뭉치들이었다.
얼마를 할 생각이냐고 묻자, 김사장은 “오늘 나는 대충 수백 정돈할건데 수천 때리는 사람도 많아”라면서 “나는 1억까지 따봤어. 그 이후에 잃어서 문제지”라며 너털 웃었다. 그가 1억을 딴 것이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이날 300만원어치 구매권을 산 것은 맞다. 마권 판매가 끝나자 이내 스크린 속 말들이 출발선에 들어섰다. 무심한 척하던 사람들의 얼굴이 슬슬 불그스레 달뜨기 시작했다. ‘탕’ 장내의 모든 이들이 스크린에 빨려 들어갔다. “3,9 3,9!” “옳지!” “3, 13” “달려라!” “그래!” 온갖 말들이 허공에 뒤섞인다. 숨이 가빠지고 눈동자가 커졌다. 기수의 채찍질 한번한번에 경마장 전체가 들썩들썩 거렸다.
64초.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찰나의 희열이 지나가고 나자 공허함이 장내를 가득 채웠다. 대부분 안색이 어두웠다. “아 씨X” “X같네” 등 욕설이 한바탕 오가고 나자, 다시 사람들은 책을 펴거나 담배를 피웠다. 틀로 찍은 듯 똑같은 모습이 하루 16번, 오전 11시40분부터 오후 6시30분까지 반복된다. 1층 입구와 화장실 몇 군데에는 소액대출을 해준다는 명함들이 사이사이 꽂혀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옆에 앉은 김 사장 역시 경마장을 처음 들어설 때와 표정이 사뭇 달라져 있었다. 대학 시절 무수히 느꼈던 슬픈 예감은 오늘도 빗나가지 않았다. “자신 있다”던 열에 여덟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며칠 전 광진구에서 한 가장이 경마빚으로 인해 가족들을 남겨두고 목숨을 끊었다. 버스기사였던 그는 빚을 갚기 위해 회사도 그만뒀다. 그러곤 퇴직금을 다시 경마장에 들이 부었다. 그후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없었다. 경찰 관계자에 따르면 이곳, 경마장만 해도 한달 매출이 500억에 달한다고 한다. 1년이면 6000억이다. 서울 외곽의 7층 건물 하나에 들이부어지는 욕망만 그 정도라는 것이다. 민증 검사를 똑바로 하지 않는다든가, 베팅한도를 제대로 규제하지 않는다는 것은 소소한 문제였다.
욕망은 교묘하다. 먹잇감을 필요로하는 거대한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목을 힘껏 조르고 있을것이다. 도심 한복판에 벌어지는 고삐풀린 욕망들의 질주. 여기서 내가 본 것은 무엇일까. 오락이라는 이름 아래 합리화된 이곳은 과연, 필요악인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