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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리스 Sep 18. 2016

재판장에서 본 사람들

수습일기

나는 종교가 없지만, 군시절 불교 군종병이었다. 제대할 때까지 8개월 정도 했던 것 같다. 신임 대대장 눈에 띄었던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뭐, 군종병이라고 해서 별 건 없었다. 이름만 군종병이었고 평소 하는 일은 다 같았다. 꿀같은 일요일 아침마다 법당 청소를 해야 했던 것만 달랐다. "제가 왜.."라는 말이 목구멍에 올랐지만 서슬퍼런 간부들 눈빛에 도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말년에 무슨 날벼락이었는지.


온갖 짜증과 함께 시작한 일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가끔은 일요일이 기다려지기도 했다. 종교의 가르침이 제대 전 스트레스를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어서였을까. 불교에서 강조하는 ‘무욕’과 ‘평정'이 말년의 병장에게 가장 어울리는 가르침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지금도 종교는 없지만 가끔 무작정 절에 찾아가고 싶을 때가 있다.


법조팀 첫 출근날인 오늘 오후 찾은 서울중앙지법 401호 재판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너무 일찍 와서였을까. 조용한 재판장 구석구석을 눈에 담았다. 나무 의자며 나무 책상, 나무로 만들어진 재판석. 온통 나무였다. 10분쯤 지나자 승복을 입은 민머리 스님 열 네댓명이 재판장에 우르르 들어왔다. 재판장 절반이 스님으로 채워졌다. 그 광경이 얼핏 저기 어디 산자락 절간 같아서 그랬는지 몰라도, 불현듯 군시절 법당 풍경이 떠올랐다. 하지만 실상 이들은 폭력행위 등으로 조사를 받으러 온 피의자 무리였다. 문득 옆자리에 앉은 한 스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점도 있고, 흉터도 있고, 여드름도 있었다. 그 옆에는 눈썹 문신을 한 스님도 있었다. 거기에 앉은 그들은 한 명의 인간일 뿐이었다.


판사는 증인이자 피의자인 3명을 신문했다. ‘태고종 폭력사태’로 인한 재판이었다. 총무원장 자리를 둘러싼 내부 권력다툼 사건이었다. 쇠파이프, 몽둥이, 전기드릴, 용역깡패, 감금, 협박, 이태원파…. 재판 내내 종교와 거리가 먼 단어들이 툭툭 튀어 나왔다. 영화 같았다. 스님들이 용역깡패들과 손잡은 뒤 반대파 스님들을 두들겨 패고 옷을 벗긴 채 절간에서 끌어낸다. 총무원사 주변에는 이전에 권력을 잡았던 스님들이 쳐 놓은 날카로운 철조망이 높게 걸려 있다. 어떤 스님은 또 다른 스님이 휘두른 각목에 머리를 맞고 혼절하기도 한다. 스님들이 양복만 걸쳤으면 선굵은 누와르가 됐을 듯 싶다.



양측 진술이 갈리니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두 번의 물리적 충돌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친 건 맞다. 전기드릴, 철조망, 몽둥이, 각서가 등장했던 것 역시 사실이다. “억울하다”며 목소리를 높이는 총무원장 스님도 바깥에서는 인정받는 고승이었을 것이다. “낭심을 잡혔다”며 씩씩대는 스님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문득 지난번 동부지법 신해철 의료사고 때 본 피의자 강모 원장이 생각났다. 그 역시 의사로서 명망 높았던 사람이었지만, 재판장에선 앙상하고 초라한 민낯만을 드러냈다.


재판장은 신기한 곳이다. 판사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 어떤 호통보다 무겁고 매섭게 느껴진다. 오히려 판사의 태도가 무료하거나 차분할 수록 더 무서워 보인다. 피의자들은 바깥에서 어떤 일을 하며 살았든, 어떤 삶의 궤적을 걸어왔든 간에 하나같이 발가벗겨졌다. 재판에 들어선 경험이 별로 없어 단정하기는 이르지만 아마 다른 재판들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것 같다. 무욕과는 거리가 먼 이곳에서, 평정심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누런 이빨의 스님들을 보고나니 더욱 그럴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앞으로 나는 이곳에서 어떤얼굴들을 마주하게 될까. 재판 막바지, 증인으로 선 한 스님이 각목에 맞았다며 판사에게 인상을 찌푸려보였다. 대단히 진지한 표정으로 뒷통수 부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는데, 무척이나 간절해보이는 그 모습에 왠지 웃음이 나왔다. 이를 본 몇몇 스님들도 민둥머리 뒷통수를 긁적거렸다. 그 순박한 모습을 보고있자니 괜시리 내 뒷통수가 간질거리는 것 같았다. 문득 절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201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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