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에 비친 세상
“예쁘네. 근데 그거 뽑아서 어디다 써?”
어쩌다 한 지인에게 최근 생긴 취미를 말하자 돌아온 반응이다. 요즘 쉬는 날이면 서울 곳곳의 인형뽑기방에 ‘원정’을 가곤 하는데 재미가 쏠쏠하다. 좋은 건 나누라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굳이 권하지는 않는다. 대부분 사람들이 인형뽑기를 ‘인생(돈)의 낭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래서 그걸로 뭐할 거냐”는 거다.
한번은 ‘전리품’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렸다가 동료기자들로부터 “철부지도 아니고 그 나이 먹고 뭐하냐”, “그 돈으로 여자나 만나라”는 덕담(?)이 돌아오기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주말이면 꿋꿋이 지폐 몇장을 주머니에 챙겨서 집을 나서고 있다.
뭘 모르는 사람들이 자꾸 운이라고 하는데 인형뽑기엔 나름 심오한 세계가 있다. 기계의 브랜드를 비롯해 내부에 깔린 인형의 종류와 양, 미묘한 위치와 각도, 집게의 악력과 벌리는 위치, 집게에 감긴 고무줄 등등.. 고수들은 뽑기방에 들어서는 순간 매서운 눈으로 전장(戰場)을 살피며 전략을 세운다. 내가 그렇단 건 아니고 최근 열심히 보고 있는 ‘인형뽑기 노하우’ 동영상에 나오는 사람들이 그렇다는 것이다. ‘풍차돌리기’, ‘누르기’, ‘뒤집기’, ‘끌기’ 등 뽑기기술만 10가지가 넘는다. 그러니 멋모르고 나선 하수들 입에서 볼멘소리가 나올 수밖에.
요즘 여러 뽑기방을 돌아다니면서 특히 눈에 들어온 것은 40∼50대 중장년층이 적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이와 함께 온 부모들은 물론 홀로 온 이들도 상당했다.
지난 주말 홍대의 한 뽑기방에서 본 50대 아저씨 주변에 금세 사람이 몰렸다. 인형을 한아름 담은 봉투를 들고 있던 그는 한눈에 봐도 이마에 ‘고수’라고 쓰여있었다. 주변에서 ‘와!’ 혹은 ‘아…’ 하는 탄성과 탄식이 잇따랐다. 덩달아 아저씨의 돈도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주변 반응에 살짝 상기된 듯한 그는 “아이들 주려고 시작했다가 이제는 취미가 됐다”면서도 “뽑은 인형이 한 트럭인데 이름은 잘 모른다”며 멋쩍어했다.
전국의 ‘노른자위’에 뽑기방이 우후죽순 들어서는 것엔 이처럼 구매력 있는 중장년층이 한몫하고 있다. 떠올려보면 어린시절 동네 만화방 앞 인형뽑기를 늦은밤까지 붙잡고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아저씨, 아줌마들이었다. 인형뽑기를 그저 ‘인생의 낭비’ 혹은 ‘철부지들의 놀이’로 치부하기 꺼려지는 건 이 때문이다.
인형뽑기는 사실 어른들의 놀이다. 자본과 인내심을 XY축으로 설계된 인형뽑기는 애당초 아이들을 겨냥하지 않았다. 어쩌면 일에 치이느라, 아이 키우느라 1000원짜리 한 장 허투루 써본 일 없는 이들에게 인형뽑기가 얄궂은 위로가 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대롱대롱 매달린 인형처럼 하루하루가 위기인 청춘들은 뽑기방에서 작게나마 성취감을 얻기도 한다. “쓸 데도, 둘 데도 없다”는 인형뽑기에 사람들이 자꾸만 몰리는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닐까.
어젯밤 찾은 뽑기방에도 사람들이 북적였다. 따가운 눈총에도 뽑기 열풍이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는 것은 우리 사회에 변변한 위로나 성취감을 얻을 곳이 그만큼 드물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가 뽑고 있는 것은 이름 모를 인형, 그 하나만이 아닌 것이다.
2017.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