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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mart Festival Mar 11. 2020

아기 에티켓?

아기여, 그 입 다물라

"노 키즈존? 당연한 거 아니야?"

"사장님이 어떤 손님을 받느냐는 사장님 마음이지."라고

나는 당연하게 생각했었다.  


"아니 생각을 해봐. 내가 내 돈 내고 밥 먹으러 갔어.

근데 옆자리에 어떤 가족이 왔는데 세상에 시끄러운 애 하나 때문에

여러 사람이 그 시간을 망쳤다고 생각해봐. 그게 누구 탓이야?"

"부모가 제지하는데 한계가 있잖아. 아예 못 오게 하는 게 맞는 거 아냐?"

"아이들은 아이들이 시끄럽게 해도 좋은 곳으로 가면 되잖아."

너무나 바른말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아이들도 우리 사회의 구성원임을 잊고 있던 말이었다.



펫티켓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반려동물이 가도 되는 곳만 가야하고 다닐 때는 입마개를 하고 대소변을 치우고 목줄을 해야 한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의 의무이다. 인간과 동물의 조화로운 공존을 위해서.

서로가 피해를 주지 말자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다른 시각으로 다시 생각하면 어디까지나 철저하게 인간이 중심인 사회에 셋방살이를 하는 동물들에게

조심히 살라는 이야기 같기도 하다. 사람 사는 곳에서 같이 살고 싶으면 사람에게 피해 주지 말라는 의미다.

사람 사는 곳. 그곳은 누가 정했던가. 미안하지만 사람이다. 모든 동물 중에 가장 똑똑하고 힘 있는 인간.




아기를 낳고 나는 마치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처럼 "베이비 에티켓"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소위 "조용히 시켜"라는  압박이었다. 아기는 말을 못 하니 우는 것이 제 일인데

외출을 해서 아이가 우는데 그치게 하지 못하거나

그 자리에 머무르면 그것은 마치 에티켓을 지키지 않는 사람 같은 취급이었다.

"조용히 못 시킬 바에는 집에 있어" "왜 굳이 어린아이를 데리고 나오냐"는 말도 들었다.

(그래도. 코로나 사태 덕에 일주일 내내 집에만 있는 게 어떤 건지 그분들은 조금은 알게 되었을까?)

데리고 나갈 수 도 없는 비행기에서 갓난아기가 울면 승객들은 눈총을 준다.

뒤돌아 본다. 소곤댄다. 승무원을 나무란다.

엄마의 마음은 타들어 간다.

엄마도 해외 출장길에 여행길에 비행기에서 아기가 울 때의 그 짜증스러움을 알기에.




임신 기간에 선배 엄마들이 "외식 많이 해. 아이 태어나면 한동안 못하니까."라든지 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그 말을 대충 넘겼는데 정말 뼈저린 충고였다.

정말 그 어디에도 갈 수 없었다. 일단 아이가 어리면 어디를 가려고 하면 이민가방 하나를 싸야 했다.

기저귀, 분유병, 보온병에 물, 분유, 거즈 손수건 여러 장, 물티슈, 여벌 옷, 울면 달랠 장난감, 날씨에 따른 겉옷, 담요... 아기는 유모차에 타기 싫을 수도 있으니 아기띠까지...

그냥 집에 있는 것이 편해서 강제 가택연금에 들어갔다. 아니,  자발적 자가격리인가?


아이가 100일을 넘어가니 간신히 어디를 좀 나갈 수 있을까?라는 희망이 생겼다.

첫 도전은 아파트 뒤편에 산 중턱(?)에 있는 커피숍이었다.

혼자서는 못 간다. 유모차에 태워서 가다가 아이가 울 것 같으면 안아줘야 하기 때문에.

아이를 안고 유모차를 밀려면 손이 네 개 필요하다. 그래서 친정엄마나 친구나 남편이 동행해줘야 가능하다.


커피 한 잔을 시킨다.

"우우 우웅~~~"

카페 라떼야 정말 오랜만이지 우리?

커피가 갈려 나오는 그 소리. 몇 개월간 못 들었던 그 소리. 커피 향.

잠시나마 행복한 여유의 끝자락을 잡아 볼라치면 아이가 꿈틀꿈틀.

 

번개 같이 안아 올린다. 커피가 나왔지만 마실 수 없다. 손이 없다. 왜 인간은 손이 두 개뿐인가.

안고 돌아다닌다. 아이가 두리번 대다가 울려고 한다.... 빠른 포기가 현명하다.

커피를 과감히 포기하고 아이를 데리고 나온다.


남에게 피해주기 싫어하는 남편의 성격 덕분에 어디 가서든지 아기가 울면 바로 일어서서 나왔다.

커피숍이든 식당이든 아기가 울면 둘 중 한 명이 아기를 안고 서성이면서 밖을 헤매었다.

그때는 그것이 당연했다. 남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되는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항상 마음이 급했다.

언제 어디서든지 가짓수도 많은 그 짐을 후다닥 꾸려서 그 자리를 뜰 준비가 되어있어야 했다.

한 택시 기사님은 엄마들은 항상 뭘 놓고 내린다고 하셨다. 맞다.

혼자 다닐 때 제아무리 꼼꼼하고 철두철미한 사람이라도 아이와 다니면 꼭 뭔가 사라지고 없어지고 놓고 온다.

아이는 울고 주변의 눈총이 느껴지고 짐은 많고 손은 두 개다.

(다음 생에는 지네로 태어나고 싶다. 아니 코끼리도 괜찮겠다. 코로 라도 아기를 안을 수 있을 테니.)


나에게 마음의 평화를 준 것은 20년간 보육 관련 일을 했다는 한 일본 여성이 쓴 책이었다.

#오늘부터훈육을그만둡니다

만약 나처럼 집 밖에서 미안한 마음에 "죄송합니다"를 입에 달고 사는 엄마라면 추천하고 싶다.


그 책이 내 마음에 깨달음을 준 것은 우리 사회가 누구를 기준으로 삼고 있는가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 엄마인 나조차도 우리 사회의 기준은 어른, 표준화된 전형적인 어른으로 믿고 있었다.

예전에는 동네에 아이들이 넘쳐났다고 한다.

어딜 가나 아이들이 있었고 시끄럽고 혼나고 도망가고 그러한 것이 일상이었다.

 

요즘은 아이들이 귀하다.

그런데 오히려 그래서 더욱 공공장소의 매너의 기준은 절대 다수인 '어른'을 기준으로 삼게 되었다.

아이들은 소수, 마이너가 되었다. 어떤 장소에 아이가 존재하는 것이 '드물고 예외적인' 일이 되었다.

요즘 아이들이 왕처럼 떠받들여지는 것 같지만, 사실 소수자가 되었기에 "아이다울 기회"를 많이 빼앗긴다.

어린아이들에게는 던지고 깨지고 떨어지는 것을 보는 것이 공부이다.

울고, 떼쓰고 혼나고 실패하면서 큰다. 더러워지는 것이 놀이이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이 용인되는 장소는 없다. 심지어 어린이집에서도 천천히 걸으라고 교육받는다.

이것이 아이들의 권리를 빼앗은 것은 아닌가.


어른들이 '착한 아이'에게 바라는 것은 아이가 어른처럼 행동할 때 착하다고 말한다. 

옷을 더럽히지 않고, 물건을 어지르거나 더럽히지 않고, 싸우지 않고 하는 것들.


아기와 아이들도 아이답게 놀고 생활할 권리가 있다.

어른들이 중심인 세계에서 세상의 대부분의 공간을 어른들이 차지하고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라고,

키즈카페라고, 체험학습관이라고, 어린이집이라고, 유치원이라고 만들어 놓고는

거기에서만 생활하라고 하는 것은 아이들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에너지가 넘치는 아기들이 기본적 뜀박질 욕구를 해소하지 못하는 아파트 시대. 층간 소음의 주범은 사뿐사뿐 걷는 어른을 기준으로 아파트를 지은 건설사는 아닐까.




모든 우리 사회의 공간은 기본적으로는 아기부터 노인까지 이용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만들어졌으면 한다.

건물의 계단, 화장실의 손소독제와 비누의 위치. 회전문의 속도까지. 

우리 사회에서 정책이든, 시설이든 무언가가 만들어질 때 너무나 당연하게 30-40대의 건강한 어른만을 기준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으면 한다.


어린이는 나라의 미래가 아니다. 어린이는 현재를 같이 살고 있는 사회의 구성원이다.


오늘도 나는 내 아이가 어른들이 조용하길 바라는 공간에서 조용히 하는 아이가 되도록 훈육을 한다.

피터팬이 살고 있는 네버랜드, 어른이 중심이 아닌 아이들이 다수이고 어른은 소수인 곳으로 가지 않는 한,

사회에서 아기는 어린이는 언제나 약자이므로.  

억울하면 어서 자라서 조용하고 깨끗한 것이 편한 어른이 되는 수밖에.




끝.


철없이 간지(?) 나게 살아온 인생에 가장 큰 위기를 맞이한 육. 알. 못. 엄마의 솔직한 육아 분투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기는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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