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발 늦은 신작 영화 이야기
0.LA LA LAND
바라던 꿈이 이루어진 현실 속에 바라던 사람은 없을 수도 있다. 꿈이 이루어졌을 때, 더 이상 꿈은 꿈이 아니라 새로운 현실이 되기 때문이다.
1.Another day of the sun(프롤로그)
영화가 시작하면 빵빵 경적 소리가 울리는 꽉 막힌 고속도로다. 모두들 경적을 울리며 막힌 곳에서 탈출하고 싶어 한다. 한 여성이 노래를 시작하며 차 문을 열고 도로로 나오고, 이내 모든 사람들이 차 밖으로 나온다. 사람들은 도로에서 춤추고 노래한다. 답답한 현실 속에 벌어지는 비현실적 일탈이다. 그렇게, 지금부터 ‘환상적’ 이야기가 시작될 것임을 알린다. 차 안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차 문을 열고 등장한 사람들은 각기 각색이다. 인종, 성별, 생김새 모두 다양하다. Crowd 속 개별적인 someone들이다. 그들은 노래한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는 법이라고.
영화의 주인공 미아와 세바스찬의 첫 만남 역시 이 고속도로 위에서 이루어진다. 자동차 안에서 연기 연습을 하던 미아는 길이 났음에도 빼지 않는다. 미아의 뒤에서 기다리던 세바스찬은 경적을 울려 미아를 놀래 킨다. 세바스찬은 정신 차리라는 듯 제스처를 취하고, 미아는 가운데 손가락으로 대답한다. 둘은 서로 이해하지 못한다.
2.Someone in the crowd(겨울)
“네 이름을 모두 알게 될 기회야. 너를 이끌어 줄 누군가가 있을지도 몰라.”
미아는 친구들의 설득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내키지 않던 파티에 참석하지만 역시 그런 someone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Someone in the crowd라는 희망찬 노래는 미아에게 반대로 해석된다.
“나 역시 남이 보기엔 someone in the crowd에 불과할지도 몰라. 그게 두려워.”
설상가상으로 미아의 차는 견인되어 버린다. 미아는 멋들어지게 드레스를 차려입은 채로 터벅터벅 집으로 걸어간다. 여기서 세바스찬과 미아는 두 번째로 만난다. 세바스찬이 해고당하게 되는 레스토랑에서.
열정적인 재즈 피아니스트인 세바스찬은 현실과 타협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그는 절대 누군가가 자신에게 ‘명령했다’고 여기지 않고, 동등한 입장에서 ‘합의’했다고 말한다. 정말이지 재즈 이스트답다. 현실을 낭만 속에 사는 그는 결국 캐럴을 연주하라는 지배인의 ‘명령’을 어기고 재즈를 연주하고 만다. 세바스찬은 즉석에서 해고를 당한다. 그는 연주에 감명받은 미아의 대화 시도를 무시하고 나가버린다. 이번엔 세바스찬이 미아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날린 셈이다.
모두에게 춥기만 한 계절, 겨울이다.
3.A lovely night(봄+여름)
길고 외로웠던 겨울이 끝나고 드디어 봄이다. 둘은 파티에서 세 번째로 만난다. 이 지점에서 미아는 자신의 자동차가 어디에 세워져 있는지 모르고 찾지 못하지만, 세바스찬이 가르쳐준 대로 머리에 대고 쏘자 발견한다. 영화 초반부터 자동차가 계속해서 나온다.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은 공간을 옮기며 많은 대화를 나눈다. 그 공간은 크게 4군데로 나누어지는데 모두 상징하는 바는 같다. 첫째는 미아가 일하는 세트장이다. 전체가 영화 세트장으로 이루어진 그 장소는 미아의 꿈과 낭만이 그대로 투영된 환상적 공간이다. 둘째로 그들이 닿는 곳은 재즈바다. 처음에 미아는 '나는 재즈가 싫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세바스찬은 미아를 재즈바로 데려가 재즈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 열변을 토한다. 세바스찬은 재즈란 틀 안에서 연주하면서도 끊임없이 변주하는 음악이라 말한다. 재즈는 우리의 삶을 투영한다. 틀 안에서 살아가면서도 어떻게든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변주하고 저항해야 하는 우리네 삶. 하지만 그런 재즈는 이제 사라져 가는, 과거의 낭만 같은 음악이 되어버렸다. 어째서 세바스찬이 재즈 이스트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 한 편으로 그런 재즈를 싫어하는 (이때까지의) 미아가 어떤 성격의 캐릭터 인지도 알 수 있다.
세 번째 공간은 이들의 첫 번째 데이트 장소인 리알토 극장이다. 이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들은 아주 옛날 영화들이다. 즉, 리알토 극장은 재즈와 마찬가지로 꿈과 낭만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미아는 전도유망해 보이는 남자 친구를 포기하고 리알토 극장의 세바스찬에게로 향한다. 현실과 타협하던 과거에서 벗어나 꿈을 선택한 것이다.
마지막은 그리피스 천문대다. 천문대란 우주를 바라볼 수 있는 장소다. 우주는 너무나 멀고 광활해 닿지 않는, 그러기에 더더욱 환상적이고 낭만적인 공간이다.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하면, 이 천문대의 하늘에서 춤을 추는 씬은 호불호가 갈릴 수 있을지언정 누구에게나 꽤 인상적이었을 것이다. 이 장면은 소설과는 달리 영화에서만 할 수 있는 연출을 극도로 과장해 살린 것인데, 예컨대 소설에서 ‘구름 위를 나는 듯한 기분’이라고 묘사할 수 있는 장면을 실제 구름 위를 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영화식으로 ‘묘사’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돌아오면, 둘은 연인이 될 수밖에 없다. 미아와 세바스찬은 모두 가혹한 현실을 살면서도 꿈을 잊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닮았다. 미아의 꿈은 스타 배우다. 하지만 그녀의 현실은 연단 오디션 낙방과 그에 따른 좌절의 연속이다. 세바스찬의 꿈은 재즈 카페 개업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세바스찬은 무일푼이다. 그리고 그토록 사랑하는 재즈는 죽어가고 있다.
둘은 닮았지만 꿈을 향한 믿음과 열정의 강도에 있어서는 세바스찬이 앞선다. 그래서 세바스찬이 이끌고 미아는 이끌린다. 데이트를 위해 찾아왔을 때도 세바스찬은 자동차 경적을 울려 미아를 부른다. 자, 이제 자동차의 의미가 대략 나온다. 세바스찬은 언제나 자동차 경적을 울려 미아를 부르고, 또 그녀가 움직이도록 이끈다. 탭댄스 씬에서도 미아는 혼자서 차를 찾지 못하지만, 세바스찬이 가르쳐준 대로 머리에 대고 송신기를 누르자 찾을 수 있게 된다. 둘의 자동차는 외양부터 정반대다. 미아의 자동차가 흔해빠진 도요타 프리우스인 반면, 세바스찬의 자동차는 클래식 시대의 오픈카다.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정말 낭만적인 남자다.
4.City of stars(가을)
뜨거운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왔다. 열정은 식고 이제 냉정을 찾을 시간이다. 이 세상은 그야말로 별들의 도시다. 별이 너무 많아서 나는 나만의 별을 찾을 수가 없다. 누구나 어릴 적 밤하늘을 보며 저 별은 나의 별 어쩌고 하는 민망한 상상을 해 본 적이 있을 터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며 점점 의구심이 생긴다. 저 별은 정말 나만을 위해 빛나는 걸까?
이제 세바스찬은 현실을 직시하게 됐다. 미아를 위해 혐오하던 밴드 키보드 일을 시작하고 크게 성공한다. 세바스찬은 이제 꿈을 좇는 일이 못 미덥다. 이게 현실이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서로 부대끼며, 상대의 시선을 느끼며 살아가야 한다. 재즈의 포기다.
하지만 미아는 다르다. 이제 그녀는 재즈가 좋다. 과거 적절히 현실과 타협하며 꿈을 좇던 그녀는 이제 카페 아르바이트까지 그만두고 온전히 꿈을 위해 1인극을 준비한다. 둘은 어긋나기 시작한다. 서로의 존재만으로 위안을 받으며 꿈을 추구하던 공감대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세바스찬이 이끌고, 미아가 이끌려오던 관계가 이 지점에서 잠시(!) 역전된다. 현실과 타협한 세바스찬과 아직까지 꿈을 믿고 따르는 미아의 관계가 뒤바뀌었기 때문이다. 둘의 첫 만남을 다시 떠올려 보자. 코앞에 닥친 오디션 연습을 하느라 도로가 뚫렸는데도 움직이지 않던 미아의 뒤에서 세바스찬은 크게 경적을 울리고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모션을 취한다. 그런데 지금은 미아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모션을 취하게 된 것이다.
결국 둘은 파국을 맞는다. 세바스찬은 ‘현실’인 밴드 커버 촬영 탓에 미아의 오랜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함께 하지 못한다. 미아의 1인극은 대실패하고 미아는 낙향을 결정한다.
세바스찬의 타락(?)은 커버 촬영 장면에서 더 세밀하게 찾을 수 있다. 세바스찬은 사진사의 말을 잘 따른다. 놀라운 일이다.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는 자신의 신념을 부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 마지막에 사진사의 아무 곡이나 연주해달라는 요청에 본인 테마곡(오리지널 곡이라 제목이 없다)을 연주하는데, 이는 리알토 극장의 약속을 앞두고 레스토랑에서 이 테마곡을 들은 뒤 남자 친구를 버리고 세바스찬에게 달려온 미아와 대비되는 모습이다. 현실을 제쳐두고 꿈을 좇은 미아와, 꿈을 제쳐두고 현실을 찾은 세바스찬은 더 이상 함께 할 수가 없다.
5.Audition(가을)
무모한 듯 덤벼들었던 미아의 도전은 헛된 일이 아니었다. 미아의 연극을 본 극소수의 관객 중 영화 연출자가 있었고, 미아의 오디션을 보고자 연락이 닿는 세바스찬에게 전한다. 세바스찬은 다시 미아를 데리러 가서 (마지막으로) 경적을 울리고 그녀를 끌어준다. 사실 여기는 이 영화에서 약간 아쉬웠던 점인데, 역전된 관계가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됐건 미아는 오디션을 본다. 이 최후의 오디션이 요구하는 것은 진솔함이다. 자기 자신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 달라는 것이 과제다. 미아는 노래한다.
“약간의 광기를 가지고 꿈을 꾸자. 꿈을 좇는 일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까 두려워 말고, 재지 말고 일단 센 강에 뛰어들어 보자!”
오디션을 마치고 둘은 그리피스 천문대에 앉아 마지막 대화를 나눈다. 그들은 낮의 천문대를 보고 한 마디씩 한다.
“낮에는 처음 와 보는데 별 볼 일 없네.”
그리피스 천문대는 한때 함께 구름 위를 날기도 했던 환상의 공간이지만, 이제 둘은 그때와는 다르다. 이상만을 맹목적으로 좇아보기도 하고, 또 현실과 타협해보기도 했으며, 꿈의 실패에 좌절해보기도 했다. 더 이상 미아와 세바스찬은 환상만을 보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가 낭만이 아닌 현실 속에 살고 있음을 이해하게 됐다. 낮과 밤을 구분할 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둘은 밤의 낭만 역시 잊지 않았다. 현실을 살되 그럼에도 꿈을 놓지 않는 것. 재즈처럼, 틀 안에서 연주하면서도 마음껏 변주시켜 치고 나가는 것. 일단은 센 강에 몸을 던져 보는 것. 그게 그들이 함께 4계절을 보내며 얻은 삶의 방향이다.
6.Epilogue(또다시 겨울)
5년 뒤를 그리는 파트는 아주 재미있는 연출로 시작한다. 이 파트는 하늘로 시작한다. 그런데 이건 가짜 하늘이다. 짐꾼들이 하늘 세트장을 옮기고 있다. 감독은 관객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 지금까지의 예쁜 이야기들은, 환상은 여기서 막을 내렸다,라고.
우리의 주인공 둘은 모두 오랜 꿈을 이루었다. 미아는 유명 배우가 됐고, 세바스챤은 자기만의 재즈 카페를 열어 꽤나 손님들을 모으고 있다. 하지만 그 곁에 있는 사람은 서로가 아니다. 이것은 더 이상 환상이 아닌 현실이다. 예전의 우중충했던 현실과 차이가 있다면, 목표했던 꿈이 이루어진 후의 현실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언제나 현실을 고되다 말하며 목표가 이루어진 미래를 그린다. 이때 꿈꾸는 미래는 환상이다. 하지만 그 오랜 꿈이 이루어진 미래는 그 시점에 또 다른 현실이 된다. 이때의 현실은 환상과는 다르다. 그 현실 속에는 미처 다 얻지 못했던 ‘지나쳐간 꿈’이 미련으로 남게 된다. 그리고 다시 그 미련은 낭만으로서 변모된다. 오랜 꿈을 이룬 이들은 이제 과거를, ‘만약’을 상상해 본다. 만약 그때 그랬다면, 다른 선택을 했다면, 더 낭만적이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나 미샤와 세바스찬은 선택의 차이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그 수많은 '만약'을 슬프게 상상하면서도 마주 보며 웃을 수 있다. 재즈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즐길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서로가 낮을 살면서도 끝까지 밤을 놓지 않으며 전력을 다해 강에 뛰어들었기에 지금 이 자리에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둘은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던 때의 모습 그대로 당당하게 재회했다. 서로를 낭만으로 간직한 채 미소로 이별할 수 있었던 이유다.
★★★★★
p.s) 영화의 제목 <라라 랜드>는 LA의 별칭이라고 한다. 영어로 하면 LA LA LAND.
p.s2) 원래 이 영화의 주연은 남녀 모두 라이언 고슬링과 엠마 스톤이 아니었다. 기존에 감독이 생각하던 남자 주연은 <위플래쉬>의 주연 마일즈 텔러였고, 여자 주연은 <해리포터> 시리즈의 헤르미온느로 유명한 엠마 왓슨이었다. 하지만 협상 과정에서 마일즈 텔러는 라이언 고슬링에게 밀렸고, 엠마 왓슨은 올 3월 개봉 예정인 <미녀와 야수>를 선택하며 빠지게 됐다.
p.s3) 다미엔 차젤레 감독의 전작 <위플래쉬>는 무지막지한 열정 하나만을 가지고 꿈을 강제로 일궈내는 과정을 그렸다. 비현실적 요소가 거의 없지만 사실 굉장히 환상적인 내용이다. 반대로 <라라 랜드>는 뮤지컬 형식의 특성상 다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만, 사실 굉장히 현실적이다.
p.s4) 과거 개인 블로그에 올렸던 글입니다. 몇 군데 수정 후 브런치 첫 글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