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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트롱 Jan 25. 2017

영화 리뷰 <친절한 금자씨> -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명작 영화 돌아보기

1.

 교도소에서 출소하면 두부를 먹는다. 과오를 뉘우치고 두부처럼 하얗게, 깨끗하게 살자는 뜻이다. 그러나 누가 하얘지는 걸 허락한단 말인가? 죄인이 누구 마음대로 죄를 뉘우치는가? 예수가 죄를 사하여 주나? 아니면 부처가? 알라가? 그렇지 않다. 그를 용서할 수 있는 주체는 오로지 피해자뿐이다. 마찬가지로 ‘복수’를 할 자격이 있는 것도 피해자뿐이다. 


2.

 이 간단한 사실을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이 모르고 있다. 주인공 이금자(이영애)만 해도 그렇다. 그녀는 피해자 원모를 위해 교도소에서부터 출소 후 백 선생(최민식)을 잡을 때까지, 하루도 빼지 않고 붉은 초를 켜 기도를 한다. 원모의 부모를 찾아가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면서 용서를 구한다. 또 그녀는 원모를 살해한 백 선생에게 복수를 계획하고 실행한다. 금자는 원모를 위한 기도와 복수가 자신의 죄를 사해줄 것이라 믿는다. 모든 것은 자신이 저지른 죄, 즉 백 선생의 유괴를 도운 죄를 용서받고 또 구원받기 위해서다.

일반적으로 초는 흰색이다


3.

 희생자 아이들의 부모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이런 짓을 한다고 해서 죽은 아이가 살아 돌아오진 않음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백 선생을 향해 위법적이고 잔혹한, 스스로에게도 트라우마로 남을 ‘즉결 처형’을 제 손으로 행한다. ‘부모 복수단’의 마지막 주자 은주 할머니는 은주의 가위를 백 선생의 목 뒷덜미에 꽂아 복수를 마무리한다. ‘희생자 은주의 이름으로 악마를 처단’한다는 의미였을 터다. 그들이 한 행위는 백 선생이 아이들에게 한 것과 마찬가지의 고문이요 살인이다. 그러나 이 범죄행위는 ‘내 아이를 유괴하고 살해한 자’에게 행했기 때문에, 또 ‘내 아이의 이름으로’ 행했기 때문에 정당화된다. 즉, 그들의 살인은 일종의 희생자를 위로하기 위한 위령 차원의 복수였다는 것이다.


4.

 하지만 금자와 부모들 모두 복수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속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희생자를 위로하기 위한 복수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희생자 스스로가 복수를 감행했을 경우에만 성립한다. 타인이 희생자를 대신해 복수를 하는 것은 일종의 자기만족이다. 내 마음의 한을 풀기 위한, 내 마음속 죄책감을 떨치기 위한 복수다. 말하자면 영화에서 부모들은 아이들을 위해 백 선생을 죽인 것이 아니라, ‘죽이고 싶어서’ 죽인 것이다. 그들에겐 분명히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 ‘법적인 처벌’이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의 선택으로 자기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을 선택했다. 법에 맡기는 것으로는 분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선택에 희생자의 의지는 없다. 그러므로 그들이 피로 일궈낸 복수는 아이들을 위로할 수 없으며, 금자 역시 애초부터 이 복수극을 통해 구원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13년간 바라오던 복수를 마쳤지만 금자는 어딘가 후련하지 않다. 그녀는 웃으려 하지만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복수를 마친 금자. 그녀는 웃었을까 울었을까


5.

 복수가 끝나고 이들은 한데 모여 케이크를 나눠 먹는다. 부모들은 바람에 샹젤리에 등이 울리는 소리를 듣고 아이들이 찾아왔다 느끼며 눈물짓는다. 자신들의 복수극으로 아이들이 구원받았다 믿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먹은 케이크는 두부 같은 순백색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검은색이다. 상 젤리에 위에는 금자가 기도 때마다 피우는 초와 같은 붉은색의 초가 장식되어 있다. 그들의 복수를 통해 진정으로 구원받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는 뜻이다.

상젤리제 위의 붉은 초 장식


6.

 금자는 원모(혼)와의 만남을 통해 이를 보다 직접적으로 느끼게 된다. 화장실에서 만난 원모에게 금자는 마침내 너를 위한 복수를 마쳤음을 말하려는 듯 미소 지으며 입을 뗀다. “원모야, 내가…….” 그러나 원모는 금자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재갈로 금자의 입을 막아버린다. 금자가 백 선생의 입을 막았던 것과 같은 재갈이다. 그리고 금모는 네 말은 듣기도 싫다는 듯 금자를 비웃고 떠나버린다.


7.

 영화 속 금자에게는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던 죄가 한 가지 더 있다. ‘딸을 버린 죄’다. 금자는 그것이 ‘죄’ 임을 인지하지 못했지만 제니가 품고 있던 편지로 인해 알게 된다. 금자의 딸 제니는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피해자다. 그녀는 복수를 할 수도, 용서를 할 수도 있는 존재다. 금모를 만나고도 본인의 구원을 확신하지 못했던 금자는 그 눈이 오는 날 밤, 제니를 다시 만난다. ‘두부처럼 더 하얗게 살자’며 새하얀 케이크를 꺼내 든 금자를 보고 제니는 미소 지으며 케이크를 찍어 먹고, 금자에게도 건넨다. 금자의 죄를 용서한 것이다. 비로소 금자는 원모가 자신의 입에 재갈을 채운 의미를 깨닫게 된다. 용서는 스스로 구할 수 있는 것도, 신이 해주는 것도 아니다. 피해자가 죄를 사해 주는 것이다. 숱한 기도도, 피비린내 나던 복수극도 의미 없는 일에 불과했다. 정작 원모는 그녀를 용서치 않고 비웃듯이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그녀의 죄는 죄로서 영원히 남을 수밖에 없으며 구원도 없다. 그녀는 하얀 케이크를 먹을 수가 없다. 마지막 몸부림을 치듯 얼굴을 케이크에 박아보지만, 그녀는 더 하얗게 살 수가 없는 것이다.

돌아보면 그녀의 삶에 '흰색'은 없다. 입고 있는 옷은 언제나 검은색이거나 붉은색이며, 기도할때 피우는 초 역시 붉은 색이다




★★★★★







+) 추가적인 시선. 영화 속 페미니즘

 전체적으로 영화를 ‘복수’와 ‘용서’의 측면에서 해석했지만, 한 편으로 이 영화는 페미니즘적 색채가 굉장히 진한 작품이기도 하다. 일단 복수극의 주인공이 여성인 것부터가 그렇다. 일반적이지 않다. 그녀의 복수를 돕는 조력자들도 모두 여성이다. 이 영화에서 남성은 여성에게 무참히 당하는 악역이거나, 혹은 아주 무기력하고 수동적이다(일반적인 대중영화에서 여성의 포지션). ‘금자의 적’을 먼저 보자. 최종 보스인 백 선생은 별달리 저항도 제대로 못해보고 붙잡혀 고문을 당하고, 통역사 노릇을 하다가 비참하게 죽는다. 특별 출연했던 송강호와 신하균 역시 백 선생을 돕는 악역으로 등장했지만 금자에게 순식간에 당한다. 특히나 신하균은 마치 여성 같은 비명 소리를 내는데, 아마 감독이 요구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금자 편의 남자들은 더 하다. 제빵사(오달수)는 도쿄에서 유학을 했지만 지금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혼자 케이크를 만들기조차 힘들다. 빵집 직원 근식(김시후)은 철저히 수동적이다. 금자와 잠을 자게 되었을 때, 근식은 일반적인 여성의 포지션으로 금자에게 몸을 ‘허락’한다. 형사(남일우)는 영화에서 가장 무력한 존재다. 현재의 금자와 백 선생, 그 외 숱한 피해자들을 만든 원흉인 그는 법에 따라 죄를 징벌해야 하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금자의 복수를 돕는다.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금자는 가족들에게 동영상을 보여주고 의견을 조율하는 등 리더 역할을 하는 반면, 형사는 그 ‘형사’라는 지위에도 불구하고 그저 차를 나눠주는 메이드의 역할을 할 뿐이다. 이렇게 <친절한 금자씨>에는 일반적인 남성과 여성의 관계가 완전히 전이된 상황이 숱하게 등장한다.


 박찬욱 감독은 ‘복수’로도 유명하지만, 페미니즘으로도 많이 알려진 감독이다. 그는 주기적으로 여성을 주인공 삼고, 남자들을 물리쳐 나가는 영화들을 연출한다. 그의 여성 주체 영화들은 <사이보그지만 괜찮아>, <스토커>, <아가씨>로 이어지고 있다. <친절한 금자씨>는 그 스타트를 끊은 작품이면서 동시에 그중 가장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는 영화다. 미장센의 활용면에 있어서는 <올드보이>에 뒤지지 않고, 주제의식도 다채롭다. 개인적으로는 박찬욱 최고의 작품이 아닐까 생각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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