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영화 리뷰, 무비패스
1.
우리에게 일제 강점기는 영원한 야만의 시대다. 당대인에게는 핍박과 수탈을, 현대인에게는 굴욕과 분노를 안기는 치욕의 시대다. 각종 문화 매체에서 그려지는 일제 강점기 역시 야만이 가득하다. 일본어를 쓰는 ‘야만인’이라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순박한 조선인들을 이유 없이 매질하며 “조센징!” 소리를 지른다. 아주 평범하게, 우리가 ‘일제 강점기’를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풍경이다. 지금도 이러한 풍경들을 떠올리고 있을 아주 평범한 우리들에게 이 <박열>이라는 영화는 뭔지 모를 약간의 이질감을 선사할지도 모른다. 시대극의 거장 이준익이 그려내는 영화 <박열>의 일제는 앞서 등장했던 수많은 일제 강점기 영화들의 배경 해석과 같은 듯하면서도 조금 다르다. 영화 초반부 일본인 불량배들을 쫓아내며 뱉는 박열의 대사부터 심상치 않다. “우리가 일본 권력과 싸우지 일본 민중과 싸우냐?”
2.
물론 이준익 역시 ‘일제’의‘야만’을 전시한다. 그러나 이는 꾸밈없는 팩트에 해당하는 야만으로 한정된다. 관동 대학살과 박열의 대역죄 재판 등이 그렇다.
이준익은 단순히 폭력만을 부각하여 관객의 감정을 자극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야만과 동시에 일제 내부의 양심을 보여주기도 하며, 마치 서구 사회의 그것과 같은 법적 통제와 절차의 존재 역시 제시한다. 물론 이는 일제의 뿌리 깊은 탈아입구(脱亞入欧) 욕망, 즉 ‘문명국으로의 갈망’에서 비롯한 것이다. 일본은 ‘문명국’ 이기 때문에 야만적인 구시대적 일처리를 해서는 안된다. 내무장관은 당장 박열을 사형대에 올리고 싶으나, 법과 절차를 무시하고 일을 처리하지는 못한다. 용의자에 대한 고문은 (실제 실행 유무와 관계없이) 있어서는 안 된다. 재판을 맡은 판사는 박열과 후미코의 일왕 모욕 발언에도 발언을 중단시키지 않는다. 문명국의 재판정에서는 피고의 항변을 중단할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일제 강점기 배경 영화에서는 볼 수 없는 신기한 장면들이다.
3.
‘우리 편’에 선 인물들 역시 여타 일제 강점기 영화의 주인공들과는 사뭇 다르다. 처음 불령사의 멤버들이 등장했을 때 관객들은 작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조선인과 일본인이 한데 섞여 테러를 계획한다. 그런데 조선인인지 일본인인지 구분이 쉽게 되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 기모노를 입고 있고 한국어와 일본어를 섞어 쓴다. 테러 자금에 대해 논하면서 “그 정도나 모였어? 스고이~” 하는 식이다. 감독은 이 영화가 지금까지 쏟아진 무수한 일제 강점기 영화와 마찬가지로 소비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박열’이라는 다소 생소한 인물을 조명한 것도 그 때문이다. 놀랍게도 박열은 독립운동가가 아니다. 그는 아나키스트(소위 무정부주의자로 여겨지지만 엄밀히 따지면 다르다고 한다)다. 지금까지 95% 이상의 일제 강점기 영화는 독립운동가의 시선을 따라 그려져 왔다. 영화를 소비하는 관객 역시 일제 강점기를 독립운동가의 시선을 따라 이해하는 데에 익숙해져 있으며,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시야를 제공하는 눈의 주인이 달라지면 해석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그럴 수는 없겠지만) 이토 히로부미 시점의 영화가 나온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이해하던 일제강점기의 영화와는 정반대의 흐름이 전개될 것이다. 아나키스트인 박열이 보는 세계 역시 독립운동가들이 보는 세계와는 다르다. 그는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지 않는다. 그가 원하는 것은 억압받는 민중의 해방이다. 그 민중의 대상에는 조선뿐 아니라 일본, 그리고 만국의 모든 민중이 포함된다. 따라서 영화 역시 전형적인 ‘정의로 운조선과 사악한 일본’ 구도를 따르지 않는다. 역사적 배경은 그저 팩트라는 잘 조립된 미니어처로 지어진 무대로서만 기능할 뿐, 어떤 주관적 감정도 가미되지 않는다. 영화는 한 눈 파는 일 없이 박열의 시선을 온전히 따라가는 데에 집중한다.
4.
하지만 영화에는 몇 가지 모순이 있다. 엄밀히 말하면 이러한 영화 속 모순들은 역사적 사실 자체에 배어있는 모순이다. 물론 이준익 감독은 베테랑이며 명감독인 만큼 영화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모순점들을 많은 부분 캐치해냈을 것이고, 또 일부러 그리 연출한 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 속 모든 모순점들이 의도적 연출의 결과라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영화의 이러한 모순 사항들을 크게 감독이 의도한 모순과 그렇지 않은 모순으로 나누어 이야기하려 한다.
5.
감독이 의도한 모순은 앞서 말한 것들에 해당된다. 우선 일제가 엄밀히 지키려 애쓰는 법과 절차가 있겠다. 그들은 “우리는 문명국!”을 외치며 법과 절차를 따르려 하는 듯 하지만, 관객들이 알다시피이는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다. 답은 이미 사형으로 정해져 있다. 야만적이다. 야만의 실행을 위해 법과 절차를 지키는 문명국이라니,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다. 반대편에서 기모노를 입고 오뎅을 팔면서 일제에 항거 하자는 불령사 단원들은 대놓고 모순적이다. 전자의 모순이 일제의 황새 좇는 뱁새 행위를 비꼬는 것이라면, 후자의 모순은 영화의 테마를 보다 확고히 하기 위함이다. 이 영화는 독립운동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국가적 차원의 피아를 가리지 않는 아나키스트들의 이야기라는 점을 이미지를 통해 명확히 제시하는 것이다.
6.
그렇다면 감독이 의도하지 않은 모순은 뭘까? 바로 주인공 박열의 의식이다. 그는 처음 대역죄 혐의로 구속되었을 때만 해도 아나키스트로서 정체성을 확고히 드러낸다. 박열은 그를 취조하는 검사에게 자신의 테러 목적은 천황제 자체의 붕괴이며, 그로 인한 민중(일본과 조선을 모두 포함)의 해방을 꿈꾸노라 말한다. 하지만 영화가 후반부에 이를수록 박열은 아나키스트로서보다는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더 강하게 드러낸다. 고향 경북 문경에 묻히고 싶다며 고향에 대한 향수를 보이고, 자신의 투쟁을 조선 사람들에게 알려달라는 등의 독립운동가 같은 부탁을 한다. 심지어 중반에는 일본 민중의 해방은 불가능하다는 투의 말을 하기도 한다. 아나키스트를 추구하지만 결국 가재는 게 편인지 일본 민중은 버려도 조선 민중은 버리지 못한다. 결국 박열은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민족주의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영화 말미 재판 때는 조선 의복을 입고 조선말을 하겠노라 재판관과 딜을 시도하고, 결국 입고 나온다. 박열과 후미코가 조선의 예복과 치마저고리를 입고 재판정에 등장하는 순간, 이 영화는 더 이상 아나키스트의 눈으로 보는 새로운 관점의 일제강점기 영화가 아니게 된다.
7.
사실 이는 감독을 탓할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위는 대부분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박열은 실제 재판을 앞두고 조선말과 조선 예복을 조건으로 내걸었고, 조선 옷을 입고 재판정에 들어와 조선말로 재판을 받았다. 즉, 이는 아나키스트로서의 박열 자체의 한계요, 모순인 것이다. 사실 일제 시대의 조선인 좌파 운동가들은 누구나 근본적으로 이런 종류의 모순을 담고 있었다. 공산주의이든 아나키즘이든 결국 종점에 이르면 같다. 소련이라는 공산주의 연합의 아래에서 한 텀을 보내느냐(공산주의 역시 프롤레타리아 정부가 충분한 생산수단을 확충하면 인민에게 생산수단을 공평히 분배하고 해체된다. 즉 공산주의의 끝은 공산당 1당 독재가 아니라 무정부 상태다), 아니면 곧바로 정부와 권위 집단을 터트리느냐의 차이다. 이 두 사상을 추구하는 데에 조선의 독립은 의미가 없다. 어차피 해체되어야 할 것이라면 조선이나 일제나 같기 때문이다. 박열은 후자의 사상을 견지한 듯 보이지만 결국‘조선’의 가치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마찬가지로 당시 대다수 좌파 운동가들 역시 이런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사회주의자이고 공산주의자이며, 무정부주의자인데 민족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독립만세를 외친 것이 당대 좌파 지식인들의 현실이었다.
8.
이준익 감독은 개봉을 앞두고 한 언론 인터뷰에서 “박열이라는 인물 자체가 아나키스트로서 탈 국가적이고, 탈 민족적이었다. 인간대 인간으로서 온전한 삶의 가치관을 추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쁜 일본인’, ‘억울하지만 선량한 조선인’의 이분법적 사고로 영화를 그려내고 싶지 않았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난 영화라는 점에서는 굉장히 훌륭한 역할 수행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인물 박열의 아나키스트로서 한계를 체크하지 못하고 그를 ‘탈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영화 전면에 내세운 것은 감독이 조금은 크게 놓친 부분이지 않을까? 또 아나키스트 박열이 영화 연출상으로도 무척 자연스럽게 민족주의적인 인물로 넘어가게 되는데, 이준익 감독은 연출 과정에서 이를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일까?
9.
위의 모순들 외에도 영화에서 부족한 부분은 몇 가지가 더 있다. 미처 모두 살리지 못한 캐릭터들이 그렇다. 배신자 남자와 일본 여자 커플은 밀고 직후 영화에서 사라진다. 이중 여성은 폐병으로 피를 토하는데 큰 의미가 없다. 줄담배를 피우고, 또 직접적으로 “폐병이 있는데 줄담배라…”라는 대사까지 나옴에도 왜 줄담배를 피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감독은 둘을 잊은 것일까?
10.
인물의 해석이라는 꽤나 중요한 부분에서 적잖은 아쉬움이 있지만, 그렇더라도 영화 자체만으로 봤을 때 이 <박열>이라는 영화는 일제 강점기를 다룬 한국 영화 중 꽤 의의가 있는 작품으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아나키스트를 다룬 덕에 이 영화는 한국 일제 강점기 배경 영화 중 가장 냉정함을 오래 유지한 영화가 되었다. 어찌 됐건 ‘박열’이라는 인물을 새로 조명했고, 나름대로 잘 풀었다. 아나키즘에서 민족주의로 넘어가는 영화 연출의 아쉬움은, 오히려 잠깐의 여가를 즐기러 극장을 찾은 많은 관객들에게는 생소함과 이질감에서 익숙함과 편함으로 넘어가게 하는 긍정적인 장치가 될 수도 있겠다. 그렇게만 된다면 이 영화는 대중영화로서는 성공작이 될터다. 그렇게 박열이라는 인물과 아나키즘이라는 사상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이 영화는 충분히 제 역할을 마친 영화로서 감독 이준익의 필모그래피에 남게 되겠지.
★★★(6/10)
*본 영화 리뷰는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한 시사회 관람 후 작성되었습니다.
p.s)영화의 일본 내각 인물들은 전부 일본인&재일교포 배우들이 담당해 주었다. 재일교포 3세 김수진 대표가 만든 극단 '신주쿠양산박' 소속 배우들이 열연해 주었다고.
p.s2)변호사 후세 다츠지 역시 일본 배우 마노우치 타스쿠가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