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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트롱 Dec 17. 2018

보수가 살려면 ‘자유’를 버려야 한다

보수는 진보의 반대 급부임을 인정해야


지난 14일 한국갤럽이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18년 12월 2주차 대통령 지지율은 취임 후 최저치인 45%였다. 여당 지지율 역시 36%를 기록하며 처음으로 40%대가 무너졌다. 자유한국당 지지율은 완만한 상승 곡선이다. 이는 기존에 ‘한국당만은 지지할 수 없다’고 선언했던 자존심 강한 보수 세력들이 다시 슬쩍 돌아오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시간은 망각을 부른다고, 보수를 파멸시킨 박근혜 파문도 민생이라는 현실 칼바람 앞에 서서히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밀려나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보수 정당의 지지율은 '무당파'만도 못하다. 두 보수 정당 지지율을 합쳐야 겨우 25%로, 27%인 '지지정당 없음'에 미치지 못한다. 과거 보수 정당은 평균 45~50%의 지지율을 유지했었다. 지지했던 나머지 20%는 왜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는걸까? 적폐라든지, 여전히 부끄럽다든지 등 그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일단 나는 근본적인 이유가 한 번 무너졌던 보수라는 이념의 새로운 포지셔닝이 실패한 탓이라고 본다.


도대체 ‘보수’란 뭐냐? 아무도 제대로 답  못하는 질문

"보수란 무엇일까?" 스스로의 정치 성향을 '보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어도 한 번씩은 고민해 본 질문일 터다. 어쩐지 진보주의자들의 정책과 사상은 마음에 들지 않고, 그래서 투표를 할 때는 보수 정당에 표를 주긴 하는데, 막상 보수가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 건지는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 현역 보수 정치인들조차도 이 개념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이들이 거의 대부분일 거다. 관련한 썰이 하나 있어 여기서 살짝 풀자면, 과거 대외활동을 할 때 지금은 자유한국당 소속이 된 당시 바른정당 소속 다선 의원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는 재선도 아닌 ‘다선’ 의원이었고 이름값도 적당히 있는 정치인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보수란 무엇을 추구하는 이념이냐는 이 간단한 질문에 답이 중언부언 길어지는 꼴을 보여 크게 실망했던 적이 있다.

보수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키워드가 바로 ‘자유’다. 대한민국은 자유의 기치를 바탕으로 건국(혹은 정부수립)되었으며, 그러므로 민주주의도 자유민주주의, 경제 역시도 ‘시장의 자유’를 최우선시하는 시장경제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자유가 없는 집단인 북쪽 컬트 집단의 침략을 막아 우리의 ‘자유’를 지킨다는 의미에서 안보도 중시된다. 그래서 흔히 ‘극우’라고 인식되는 태극기 세력의 집회를 보면 언제나 “자유를 지키자!”는 구호가 나온다.

지난 대선 자유한국당 홍준표 당시 대선후보의 홍보 문구 '홍찍자'
보수가 살아나지 못하는 이유

나는 보수가 외연을 확장하지 못하고 고전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자유’를 캐치프레이즈로 삼은 것이라고 본다. 2018년 대한민국에서 ‘자유’라는 개념은 대중 설득 기제가 될 수 없다. 왜냐면 우리가 실질적으로 우리 삶을 느끼기에, 이미 대한민국은 꽤나 자유로운 나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정치적으로 주장하는 '자유'는 보다 심층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개념이지만, 대부분의 유권자는 그것을 그저 겉으로 보이는 의미로만 해석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자유를 지키자”는 구호는 일반 대중이 느끼기에 심지어 터무니 없어 보일 수도 있다. 반면 진보가 내세운 가치인 ‘평등’은 훌륭한 설득 도구가 된다.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은 언제나 불평등한 구조 속에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감정에 호소하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개념이다.


한편 자유와 평등은 둘 모두 추구할 수만 있지, 완전하게 실현할 수 없는 이상향적 개념이라는 점에서 닮은 면이 있다. 완전한 평등도, 완전한 자유도 현실 세상에 구현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 때도 평등을 내세운 진보가 자유를 내세운 보수에 비해 유리하다. 평등한 세상 구현은 커녕, 오히려 불평등이 심화되고 말았다는 비극적인 결과가 나와버렸을 때, 진보 세력은 들 수 있는 핑계가 많다. 이미 견고해진 사회 구조, 기득권의 격렬한 저항 등이다. 그런데 보수 세력의 실패는 변명의 여지가 많지 않다. 심지어 정부가 정책을 펼치다 보면 때때로 자유를 오히려 제한을 하게 되는 일도 많은데, 이렇게 되면 누구 탓을 할 수도 없고 아주 우스꽝스러워진다. 그래서 광화문 태극기 세력이 태극기를 흔들며 누구보다 전체주의자스러운 모습으로 ‘자유’를 부르짖을 수록, 오히려 이들은 이상한 사람들이 되고 대중들의 공감대에서는 더욱 멀어지게 된다. 심지어 이는 역으로 ‘자유’라는 정치 용어 자체를 우습게 만드는 역효과를 불러오는데 까지 이어진다. 즉, 보수가 내세우는 ‘자유’는 이탈한 지지자들을 불러 모을 수도 없고, 원래부터 지지하지 않던 사람들을 설득하기는 더더욱 어려우며, 심지어 언젠가 결국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는 무척 불리한 가치다.

탄핵 정국 당시 태극기 시위... 태극기를 드는 자체는 괜찮다고 보는데, 왜 항상 성조기가 나오는 걸까?
보수가 살아나려면

그렇다면 보수가 부활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보수 개념의 재정립이 필요하다. 종북 등 케케묵은 이념을 벗어던지고 ‘이성’을 제 1 가치로 내세워야 한다. 과거 바른정당이 처음 분리되어 나올 때 몇몇 소속 의원들이 합리적 보수를 주창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실패했다. 말만 합리를 내세웠지 결국 저 묵은 이념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정 합리적 보수가 되려면 고고한 자존심부터 굽혀야 할 필요가 있다. 먼저 보수는 스스로의 뿌리가 ‘반동’임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설령 기득권들의 지지를 받을 지언정, 보수는 결코 스스로를 사회 주력 사상으로 여겨서는 안된다고 본다. 보수는 진보에 반하는 개념이다. 즉, 진보가 보수의 대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보수가 엇나가는 진보를 견제하고 대안이 되는 이념이 맞는다.


보수는 단순히 ‘지금 이대로’가 아니다. 주요 정치 세력 중 하나로서 분명히 더 나은 세상으로 ‘진보’시키는 데 역할을 하며, 또 해야 한다. 다만 보수의 방식은 잘못된 것은 고쳐가되 ‘안전하게 가자’는 것이다. 어느 체제든 그 안에서 불만을 가지는 세력은 존재한다. 이들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언제나 투쟁한다. 이들이 내놓는 정책은 실제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주효한 인사이트를 주지만, 대체로 파격적이며 감정이 많이 실려 있어 현실적인 부분에서 허술한 구석이 많다. 그러나 파격적이고 감정적인만큼 대중들을 선동하기도 쉬우며 이는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치명적이다. 여기서 보수가 과속방지턱으로서 기능해야 한다. 진보 세력이 내놓은 파격적이고 감정적인 안들이 자칫 폭주를 불러 탈선을 일으키지 않도록, 침착함과 이성적인 태도로 수정해 주는 것이 보수 정치에 요구되는 역할이다. 그래서 보수에게 가장 중요한 미덕이 이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보수는 지나치게 이념에 몰두해 있고, 그에 따라 사안을 해석하려 든다. ‘이성’이라는 보수에 가장 절실한 미덕을 스스로 포기한 셈이다. 그와중에 지키겠다고 꺼내 든 이념(자유)은 대중 설득 도구로서 형편 없는 가치다(절대 자유 자체가 형편 없다는 소리가 아니다). 앞으로 보수의 얼굴이 누가 되든, 또 민주당과 정부가 얼마나 못하든 보수가 스스로 이념에서부터 전면적인 개혁을 하지 않는 이상 재집권은 요원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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