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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트롱 Feb 12. 2017

영화 리뷰 <재심> - 현실에의 절망, 영화에의 실망

무비 패스, 신작 영화 리뷰

1. 법(法)의 존재 의의

 법은 왜 있는가? 큰 틀에서 법의 존재 의의는 질서 유지다. 합법화된 힘을 질서 유지를 위해 정해진 범주 내에서 사용하는 게 법이다. 좀 더 깊게는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서 오는 사회 혼란을 해결하고 조화와 복지를 도모하기 위해 법은 필요하다. 멋진 말인가? 인터넷 백과사전 검색을 생활화하면 여러분도 이렇게 멋지게 법을 정의할 수 있다. 어쨌건 법이란 현재의 혼란을 제어해 질서를 유지하고, 궁극적으로는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단단히 틀을 잡아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다시 말하면 그 ‘법’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할 경우 사회는 뼈대부터 휘어지게 되며, 사회의 질서는 붕괴하고 종국엔 무려 리바이어던이 태어나기도 전의 자연 상태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2. 조심조심 다루어져야 하는 법

 법은 합법적 ‘폭력’이다. 때문에 만일 법을 다루는 자가 판단력을 잃는다면 법은 단순히 망나니가 사형수 앉혀놓고 휘두르는 칼에 불과하게 되며, 사법기관은 칼 좀 잘 들라고 망나니가 칼에 뿌려대는 막걸리나 다름없어진다. 그런 사회에서 사형수는 어디서 오느냐고? 원님이 주리 몇 번 틀어주면 술술 이실직고하기 마련이지. 


3. 우리 시대의 법은

 그래도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오늘날의 법에 대해 최소한의 믿음은 가지고 있다. 최소한 질서 유지를 위해 정해진 범주 내에서 사용되고는 있겠지. 아무리 그래도 원님 주리 틀던 시절이랑은 다르지 않을까?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던 시절도 가고 그래도 이제는 어엿한 민주국가 아니겠어? 자, 그런데 영화 <재심>은 말한다. 아니, 그게 아녀, 우리 법은 여전히 망나니 막걸리요, 원님 주리 트는 시절 진행형이여,라고. 


4. 실화-1

 영화 <재심>은 겨우 15년 전 ‘선진국’ 대한민국에서 진행됐던 원님 재판 실화를 다룬다. 소재는 2000년 8월 있었던 익산 약촌 오거리 택시 기사 살인사건이다. 당시 사건의 진범으로 만 15세에 불과했던 최모군이 기소된다. 1심 재판부는 그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한다(이는 2000년 당시 소년법상으로 18세 미만 소년에 대한 법정 최고형이다). 최군은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며 항소를 했으나, 이내 2심 재판에서 살인을 인정한다. 그 대가로 최군은 반성의 자세가 참작되어 징역 10년으로 감형받는다. 그리고 2010년, 최군은 징역 10년을 만기로 채우고 25세의 나이로 출소한다.


5. 실화-2

 여기까지만 보면 일반적인 살인 사건의 재판 과정과 별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이게 도대체가 2000년(그것도 민주화의 대부라는 김대중 정권하에서) 대한민국에서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인지 믿기지 않는 내용으로 꽉 채워져 있다. 먼저 최군은 원래 사건의 목격자로 사건 현장에서 조사 중인 경찰(익산 경찰서)에게 ‘먼저’ 다가가 자신이 본 정황을 진술했다. 그러나 경찰은 역으로 최군을 범인으로 의심하기 시작했고, 이내 용의자로 체포했다. 여기까지도 ‘그럴 수 있는’ 범주다. 문제는 그다음부터다. 경찰은 체포 직후 최군을 경찰서가 아닌 인근 모텔로 끌고 갔다. 경찰이 원하는 답이 나올 때까지 15세 소년은 무차별로 구타당했고, 결국 자신이 범인이라는 진술서를 쓰고서야 경찰서로 ‘정상적으로’ 연행될 수 있었다. 불법 체포이며 감금 협박에 해당하는 범죄다. 

익산경찰서. 현재는 새 건물로 옮겼다

경찰서로 돌아오고 나서도 최군은 범죄를 부인할 때마다 지속적으로 폭행당했다. 가난했던 최군의 집은 변호사도 선임하지 못했다. 대한민국 헌법 제12조 2항은 “모든 국민은 고문을 받지 아니하며,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아니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으나 최군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결국 허위자백을 하고 법정까지 가서 다시 한번 살인을 부인했으나, 재판관은 ‘괘씸죄’로 법정 소년범 최고형인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최군은 당연히 항소했으나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자신의 살인을 인정하고 법에 용서를 구했다. 법정은 반성의 자세를 참작해 징역 10년의 감형을 선고했다. 진실을 말하면 괘씸죄가 추가되고 거짓을 말하면 반성으로 여겨지는 웃픈 상황이 뉴 밀레니엄이라던 2000년 대한민국 법정에서 펼쳐진 것이다.


6. 실화-3

 아직 경악으로 벌어진 입을 닫기에는 이르다. 사건 발생 후 3년이 지난 2003년, 군산 경찰서(최군을 강압 수사한 경찰서는 익산 경찰서다)는 진범에 대한 첩보를 받고 살인 용의자 김 모 씨와 조력자인 임모 씨를 체포한다. 김 모 씨는 자신의 범죄 일체를 자백하고, 최군이 대신 잡혀간 사실에 죄책감을 느낀다고 진술했다. 이들의 진술은 정황상 상당 부분 들어맞았다. 하지만 이번엔 검찰이 증거 부족을 이유로 구속 영장 청구를 거부했다. 경찰은 흉기를 찾겠다며 쓰레기 매립장 수색 영장을 청구했으나, 검찰은 그마저도 기각시켰다. 자신들의 잘못된 수사가 평범한 소년의 인생을 구렁텅이로 몰아넣었음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회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할 법을 다루는 자들이 도리어 탐관오리와 망나니가 되어 무고한 자를 처형대에 올리고, 법이라는 칼끝을 약자의 목에 겨누었던 셈이다. 이 기 막힌 사건이 불과 17년 전 이 땅에서 벌어졌고, 또 여태껏 숨겨졌다. 최군은 2016년 11월 17일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으며 16년 만에 누명을 벗게 되었지만 15~25세까지의 10년을 억울하게 감옥에서 보낸 세월은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대한민국의 법이라는 틀은 정말 우리 사회를 잘 잡아주고 있는가? 대체 누구를 위한 법인가?  어쩌면 이 나라의 뼈대는 이미 휘어져 버린 것은 아닐까?

밤낮으로 빛나는 나라가 되었지만...


7. 이제야 하는 영화 이야기

 영화 <재심>은 억울한 사연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그리고 그 억울함을 만든 주체는 다름 아닌 법, 공권력이다. 영화는 이러한 내용의 실화를 극화함으로써 법과 정의를 동일시한 나머지 무엇이 진정 옳고 그른가를 분간하지 못하게 된 자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또 법의 희생양이 된 채 숨겨졌던 피해자들이 있었으며, 여전히 숨겨진 피해자들 역시 있을 수 있음을 암시하려 한다. 그렇다면 영화는 그러한 목적을 충분히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을 위해서는 영화의 완성도와 재미를 따져볼 수밖에 없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썩 잘 만든 영화도, 재미있는 영화도 아니다.


8. 진부한 영화

 의미를 담는 것도, 사회를 고발하는 것도 좋지만 일차적으로 영화는 재미있어야 한다. 여기서 ‘재미’란 장르적 통쾌함과 보편적인 만족도를 말한다. 아무리 많은 내용을 담고 있더라도 재미가 없으면 영화는 확장성을 갖지 못하고 천천히 잊힌다. 영화가 재미있으려면 어떠해야 하는가? 우선은 신선해야 한다. 최소한 진부하지는 않아야 한다. 그런데 만일 소재 특성상 내용의 진부함을 피할 수 없다면? 그러면 내부적으로 전개를 치밀하고 탄탄하게 가져가며 그 안에서 새롭게 변주해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영화 <재심>은 그 두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9. 영화의 문제점-1) 세계의 규모

 이 영화의 소재는 다소 진부한 이야기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또 바탕이 된 실제 사건(익산 약촌 오거리 살인사건)의 특성상 영화가 다루는 세계가 크게 좁아질 수밖에 없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예를 들어 시대는 이미 어벤저스가 출동하고 우주 단위의 괴물을 때리고 부수며 지구를 지키는 범주의 이야기로 넘어갔는데, 이제 와서 아주 소소한 능력의 히어로가 등장해 악의 연구소를 때려 부수고 마을의 정의를 지킨다는 내용의 영화를 만든다는 식이다. 대한민국의 '정의'와 관련된 영화들은 2015년 <내부자들> 이후 이미 높으신 분들이 뿌리부터 썩었다는 규모로 넘어간 지 오래다. 올해 스타트를 끊은 <더 킹> 역시 '나쁜 놈들'의 주대상이 검사, 언론이다. 그러나 영화 <재심>의 '나쁜 놈'은 경찰이다. 물론 그 위로 악질 검사 한 놈과 타락한 변호사 한 놈이 있지만 정말 딱 한 놈씩일 뿐, 메인 악당은 어디까지나 경찰이다. 악당 수준의 저하. 이는 장르적 통쾌함이란 부분에 있어 큰 약점이 된다. 


10. 영화의 문제점-2)진부한 캐릭터

  두 번째는 캐릭터다. 내용이 진부하면 캐릭터라도 맛깔나게 살아야 하는데 이 영화는 캐릭터들마저도 지나치게 전형적이다. 주인공 준영(정우)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이런 류 영화 주인공 캐릭터의 루트를 착실하게 따라간다. 빚에 찌들어 오로지 돈, 돈, 돈만 외치는 정의감 제로 변호사가 딱한 사연의 상대 인물을 만나 변해간다. 착해질 캐릭터인 건 알았지만 설마 그렇게 공식을 착착 밟아 착해질 줄은 몰랐다. 악당들은 일차원적으로 한없이 나쁘다. 그래, 이 부분은 실제 당시 경찰 놈들이 인간쓰레기에 다름없는 짓을 했으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순수하게 '영화적 재미'만을 따졌을 때 그러하다는 이야기다. 이동휘가 맡은 '창환'은 왠지 모르게 최근 검사, 검찰이 나쁜 놈이라는 류의 영화가 너무 많으니 어쩔 수 없이 변호사도 나쁜 놈들이 있다! 는 식으로 만든 캐릭터처럼 느껴진다. 현우(강하늘), 현우 엄마(김해숙) 같은 피해자 캐릭터 역시 판에 박혔다. 아, 한 가지 더. 도대체 깡패들은 왜 이렇게 정겹냐? 명색이 깡패인데 현우한테 얻어터지기만 하고 뭐 딱히 나쁜 짓 한 것도 없다. 사방 천지에 나쁜 놈들인데 깡패는 별로 안 나빠. 결국 핵심 증인인 수정이 찾아주는 것도 저들이고, 심지어 마지막에는 법정에도 앉아 있더라. 수어사이드 스쿼드인가? 나쁜 척하는 착한 놈들?


11. 영화의 문제점-3) 땜빵은 감성으로

 이 영화는 처음부터 '결말 없이' 달린 영화다. 영화가 제작 발표를 한 이후에야 재심이 확정됐고, 영화 촬영이 끝난 이후에야 무죄 판결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군데군데 '구멍'이 많다. 그리고 감독은 그 구멍을 모조리 감성과 (쓸데없어 보이는) 액션으로 메꾼다. 그러다 보니 영화 장르가 모호해졌다. 이게 분명 법정 스릴러인 것 같긴 한데 그러자니 법적인 다툼이 너무 적다. 법정 스릴러라면 역전 증거 한 방으로 단숨에 정세를 뒤집어 악당들을 감방에 보낸다든지 하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장면이 나와야 하는데, 이 영화는 마지막 결말에 이르러서도 감성으로 호소할 뿐이다. 자연히 장르는 드라마로 치환된다. 하지만 냉철함의 상징인 '법'과 드라마적 감성의 혼합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법적 문제의 해결을 드라마에 의존하는 것은 꽤나 설득력을 잃게 만든다. 물론 이 부분은 실제 재심 결과가 나오기 전 촬영을 마쳤던 터라 어쩔 수 없는 한계이기는 하다. 하지만 영화의 완성도를 위해서는 재판 결과가 나오길 조금 기다렸어도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영화의 제작 자체만으로 사건이 재조명되며 재심 청구가 통과되는 데 큰 역할을 한 만큼, 영화의 1차적 목적은 달성을 했던 셈이니까....... 

영화 <재심>의 제작진&출연 배우들


12. 결론

 어긋난 것들을 바로잡기 위해 창고 깊숙한 곳에 방치되어 있는 먼지 쌓인 서류들을 한 번씩 들춰보는 일은 필요하다. 먼지투성이의 창고 역시 청소와 환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창고가 지속적으로 깨끗하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창고를 찾아야 한다. 이런 류의 고발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의미를 담고 사회를 환기시키는 것도 좋지만, 그 새로운 바람이 지속적으로 사회에 불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영화를 재미있게 잘 만들어야 한다. <재심>은 그런 면에서 성공적인 영화로는 보이지 않는다. 마지막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기 직전 나오는 ‘실화’ 코멘트는 심금을 울리고 한탄을 부르기보다는, ‘영화가 이렇게 진부한 이유에 대한 핑계’로 느껴진다. 조금 진부한 이야기인데 이 진부한 이야기가 놀랍게도 실화입니다, 하는 식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영화는 다큐나 시사 고발 프로그램과는 달리 좀 더 재미를 느낄 수 있게 각색을 한다. 단순히 이런 일이 이었다는 사실만을 알고 싶다면 뭐하러 비싼 돈 주고 영화를 보겠는가? <그것이 알고 싶다>를 한 번 더 보면 되지. 요새는 이런 식으로 한국 영화 시장서 못 살아남는다. 설사 상업적으로 성공하더라도, 이 영화는 대중의 기억에 멀리 남지는 못할 것 같다.



★★







*브런치 무비 패스를 통해 시사회로 관람한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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